체제 선전영화가 전부였던 중앙아시아에 영화 예술의 맹아가 움트기 시작한 것은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現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영화스튜디오들이 2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피해 알마티를 비롯한 타슈켄트, 스탈리나바드(現 두샨베) 등의 중앙아시아 도시들을 피난처로 삼으면서부터였다. 이 경험 이후 중앙아시아 영화학도들에게 한동안 필수적 관문처럼 여겨졌던 모스크바 유학은 우즈베키스탄 출신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인 유수프 라지코프와 카자흐스탄 태생 다큐멘터리 감독인 세르게이 드보르체보이를 탄생시켰다. 중앙아시아에서 성장하여 러시아 영화계를 디딤돌로 삼아 자신만의 독특한 입지를 굳힌 두 감독 모두 중앙아시아-러시아 관계에 대한 내재적 외재적 시선을 겸비한 감독들이다. 라지코프의 <이주노동자>(2009)와 <모스크바바드로부터의 탈출>(2015), 드보르체보이의 <아이카>(2018)를 통해 중앙아시아 출신 이주노동자 문제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윤서현(서울대학교)
기억되고 싶은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국립대학 인문학부를 졸업하고 모스크바로 유학하여 영화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의 시나리오 작가 발렌틴 체르느이흐 등 당대 최고의 소비에트 영화인들을 사사하면서 소비에트 붕괴 이전에 탈 없이 국립영화학교(ВГИК)를 마칠 수 있었으니 유수프 라지코프 경우는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젊은 우즈벡 영화학도의 작품에 담긴 민족주의적 정서는 소비에트의 검열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촬영 이후 12년간이나 빛을 보지 못했던 <연설가>는 소비에트 붕괴 이후 한참이 더 지난 1999년에서야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그의 첫 장편으로 그 해 키노쇼크영화제 그랑프리는 물론 러시
아영화학자및영화비평가조합이 수여하는 상까지 받는 영광을 안았다. 소비에트 정권 초기 우즈베키스탄 전통사회의 질서와 소련의 정치 이념 사이에서 한 인물이 겪게 되는 가치관의 혼란상을 그린 이 영화로 명실공히 우즈베키스탄을 대표하는 감독으로 떠오른 그는 1999년부터 우즈벡필름 스튜디오의 총감독으로 재직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카리모프 정권의 거세지는 검열 강화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다 결국 이 스튜디오의 지분 중 51%를 소유하고 있던 국립영화국 우즈벡키노가 주도한 재신임 반대로 2004년 총감독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2005년부터 외국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그는, 러시아의 핵잠수함 쿠르스크 침몰 사건을 일부 소재로 한 영화 <수치>(2013)에서부터 퇴직한 한 비밀경찰의 노년의 삶을 그린 <터키 안장>(2017)과 소비에트 정권의 총아로 알려져 있던 하차투리안의 인간적 고뇌를 새롭게 조명한 <칼의 춤>(2019)까지 국가주의 통제가 야기한 폐쇄적 환경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심리를 주된 주제로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다른 한편, 감독의 이러한 주된 문제의식과는 별개로, 러시아 내 중앙아시아 이주노동자 인구 중 가장 높은 비율을 보이는 우즈베키스탄 동포들의 삶 또한 그의 관심을 끌었다. 직접 메가폰을 잡은 <이주노동자>(2009)와 시나리오 작업을 맡은 <모스크바바드로부터의 탈출>(2015)은 이 문제에 대한 그의 꾸준한 관심을 방증하고 있다.
한국에는 <삶, 그것은>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바 있는 유수프 라지코프의 <이주노동자>(2009)는 이주민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사회 문제로 부각시키는 동일 소재의 영화들과는 상이한 관점에서 중앙아시아 이주노동자 문제를 다룬다. 감독은 지하에서 공동숙식을 하고 건물 구석 벽장 같은 공간에서 숨을 돌리는 동포들의 누추한 삶을 묘사하는 대신 손자를 찾아 모스크바로 떠나온 노인 사딕의 신실함과 고매함을 강조한다. 즉 실제로 이주노동자의 삶을 살고 있을 손자 아만의 형상은 지워져 있으며(작품의 마지막까지 아만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 자리를 그의 할아버지인 사딕이 채우고 있다. 사딕 또한 노자를 마련하기 위해 식당 부엌 등에서 일을 하는 모습으로 제시되기도 하지만 그와 그를 둘러싼 환경의 정결한 이미지는 작품의 결말까지 유지된다. 감독은 동포들의 비루한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보다는 소위 ‘형제국’이었던 우즈베키스탄의 품위를 상기시키는 방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한다. 러시아어는 물론 우즈벡어, 카자흐어, 키르기스어, 몰도바어, 타지크어가 난무하는 가운데 유달리 말이 없는 사딕은 악사칼(‘흰 턱수염’을 뜻하는 말로 중앙아시아에서 현명한 노인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의 전형으로 우즈벡의 이상적 자기형상이다. 그러므로 유수프 라지코프가 제시하는 ‘이주노동자’는 매스컴을 통해 항상 복수로 등장해왔던 ‘이주노동자들’과는 그 어떠한 공통점도 갖지 않는다고 해야 하겠다.
이상적으로 제시된 인물은 이 우즈벡 이주노동자 뿐만이 아니다. 사딕이 여행 중 조우하게 되는 러시아인 등장인물들 또한 예외 없이 모두 위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상화되었다. 이들은 우악스럽고 억척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하나같이 양심적인 인물들로 묘사되어 있다. 예를 들어, 대조국 전쟁 참전용사인 사딕에게 배신 혐의로 12년 형을 선고했던 러시아인 퇴역 조사관은 사딕의 우연한 방문을 받고는 곧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인물로 그려져있다. 손자 아만의 동거녀인 러시아 여인 또한 사딕이 아만을 고향으로 데려가지 못하게 급기야 그의 거처에 불을 지르지만 이튿날 같은 자리에서 다시 아만을 기다리고 있는 사딕의 무사한 모습에 안도하며 죄를 뉘우치는 인물이다. 급기야, 마약 배송책 누명으로 체포된 사딕의 가방에서 전쟁 훈장들을 발견한 러시아 경찰들이 그의 결백을 믿어주는 장면은 차라리 동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결국 이 영화는, 우즈벡인들의 입장에서는 전통적 미덕을 지닌 긍정적 인물이 자민족의 표상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러시아인들의 입장에서는 수많은 형제국가를 이끌었던 ‘팍스 소비에티카(Pax Sovietica)’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양자 모두를 만족시키는 전략을 선택하고 있다.
형제국의 공동운명
하지만 현실은 영화만큼 낭만적이지 않았다. 이주노동자들의 주거환경은 점점 더 슬럼화, 범죄화되어 갔으며 민족주의 성향을 띠는 러시아 일부 단체들의 타민족에 대한 혐오 정서 또한 심화하였다. 특히 비 슬라브계를 대상으로 하는 폭력 사태가 빈번히 일어나면서 그 중앙아시아 이주노동자들은 그 희생자가 되었다. 러시아 내에서 연달아 자국민이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졌지만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이를 오랜 기간 방관하였다. 2013년 1월 모스크바에서 청소부로 일하던 우즈벡 이주노동자의 살해 사건이 매스컴에 오르내리자 그제야 이례적으로 입을 연 우즈베키스탄 전 대통령 카리모프는 ‘외국에서 청소부로 일할 수밖에 없다는 건 민족의 수치’라고 발언함으로써 자국민에 대한 보호 대책을 강구하기보다는 이 문제에 대한 거론 자체가 국격을 저하하는 것인 양 매도하였다. 타민족에 대한 러시아 극우 민족주의 세력의 테러는 점차 노골화되었다. 그해 10월, 아제르바이잔 출신 이주노동자에 의한 러시아 청년 살해 사건에 대한 보복이 대규모 폭력사태로 비화하는 사건이 모스크바 남부 비률료보에서 발생하였다. 비 슬라브계 이민족들의 거주지와 사업체는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의 무분별한 공격 대상이 되었다.
러시아 내 비 슬라브계에 대한 혐오범죄가 심화하던 이 시기에 유수프 라지코프는 이주노동자를 소재로 한 또 다른 작품 <모스크바바드로부터의 탈출>(2015)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다. 제목에 쓰인 ‘모스크바바드’는 이슬람권 이주노동자들의 대거 유입과 러시아 내 인구 노령화와 출산율 저하 등으로 위협을 느낀 러시아인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모스크바를 자조적으로 불러온 별칭이다. 페테르부르크의 약칭 ‘피테르’를 이용한 피테르‘스탄’이라는 표현도 같은 맥락에서 회자되고 있다. 다리야 폴토라츠카야가 메가폰을 잡은 <모스크바바드로부터의 탈출>은 제11회 카잔 국제 무슬림영화제(Kazan International Festival of Muslim Cinema(KIFMC))의 전야제에서 상영되었다. <이주노동자> 발표 이후 5년 남짓 지났을 뿐이지만 첨예화되고 있는 러시아 내 민족 간 분쟁을 목도한 유수프 라지코프의 시선에서 이주노동자 문제에 대한 이전과 같은 낙관적 전망을 찾아보기란 어렵다. <이주노동자>에서 사라져버렸던 ‘아만의 모스크바’가 <모스크바바드로부터의 탈출>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모스크바는 축축한 주황색 불빛이 비치는 어둡고 긴 지하도, 건설자재들이 널브러진 황량한 건물 내부, 아무렇게나 휘갈긴 낙서로 가득한 회색 시멘트벽으로 제시된다. 범죄화한 이주노동자 무리와 부패한 러시아연방이민국의 결탁은 이전 작인 <이주노동자>에서 영광과 죄의식을 함께 한 형제국으로서의 공동운명이 아닌 완전히 상반된 의미에서의 이들 사이에 놓여있는 어두운 공동운명을 암시하고 있다.
주인공인 마샤는 러시아연방이민국(ФМС России) 소속으로 같은 곳에서 근무하던 연인 안드레이가 불법체류자에게 살해당한 후 홀로서기에 분투 중인 여성이다. 또 다른 주인공 타지크인 하산은 이민국의 소위 ‘프락치’로 이주노동자들의 동향을 파악하여 정보를 건네는 인물이다. 그는 지극히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인물로 동포들을 모두 이 어둠의 도시 모스크바에서 구원해 그들의 고향으로 돌려보낼 수만 있다면 기꺼이 배신자 꼬리표를 감수하고서라도 러시아연방이민국에 협조하겠다는 인물로, 자신의 동포로부터도, 함께 일하는 연방이민국으로부터도 경멸의 대상이지만 가장 숭고한 의지를 지닌 인물이다. 이주노동자라면 신물을 내는 마샤는 하산과 함께 파트너로 활동하게 되면서 자신이나 이주노동자들이나 모두 모스크바의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쟁 중일뿐이라는 진실을 맞닥뜨리게 된다. 남성들의 사회에서 살아나아야 한다는 압박과 죽은 안드레이의 아파트에서 그녀를 쫓아내려 하는 안드레이 어머니의 의지에 맞서기 위해 마치 임신이라도 한 듯 연기를 하는 마샤의 처량한 상황은 열악한 노동환경에도 불구하고 일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무리로 세력화하는 이주노동자들의 처지와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다. 이민족이든 러시아인이든 이 비정한 도시에서는 모두 다 생존을 위해 최선의 발악을 하고 있을 뿐이며 러시아가 자기 안에 내재한 문제를 먼저 해결하지 못한다면 이주노동자들도 영원히 그들에게 좋은 이웃이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유수프 라지코프의 통찰이 신랄하다.
다큐멘터리스트의 시선
고향인 카자흐스탄 심켄트의 비행대대에서 일하던 세르게이 드보르체보이가 모스크바의 영화예술인 교육기관인 시나리오 작가 및 영화감독 상급양성원(ВКСР)의 교육생모집공고에 지원했을 때 그의 나이는 스물아홉이었다. 소비에트의 갑작스러운 붕괴로 입학 이듬해에 프로그램에 대한 지원이 전면 중단되면서 남은 교육과정을 자력으로 마쳐야 하는 어려움을 겪어야했지만 재학 기간 중 과제로 제작한 <행복>(1995)과 <빵 오는 날>(1998)을 비롯 졸업 후 제작된 <길>(1999)과 <어둠 속에서>(2004)까지 매 작품이 수많은 영화제를 통해 인정받음으로써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으로서의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현재는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상태이지만 카자흐스탄 국적의 러시아인으로 청년기를 보낸 드보르체보이는 자신을 ‘카자흐스탄 감독’이라 소개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과작이기는 하지만 대부분 그의 작품들은 중앙아시아 초원의 자연과 정서를 소재로 하고 있을뿐더러 촬영팀의 절반 이상이 카자흐스탄 출신이기도 하다. 다큐멘터리가 아닌 그의 첫 내러티브 영화로 2008년 칸 영화제의 주목할만한시선(Un Certain Regard) 부문 대상을 수상한 <툴판> 또한 러시아인 촬영팀과 중앙아시아 배우들의 합작품으로, 초원지대에서 유목생활을 하는 가족 간의 사랑과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다룬 작품이었다. 초원의 모래폭풍 속에서의 양몰이 장면이나 출생 직후 죽어가는 갓 난 어린양에게 숨을 불어넣어 회생시키는 장면 등은 다큐멘터리 영화 출신 감독 특유의 불굴의 인내심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명장면이다.
그리고 작년, 이주노동자를 소재로 한 <아이카>(2018)가 6년이라는 긴 제작기간 끝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세르게이 드보르체보이 감독이 다큐멘터리스트로 남아있었다면 이 영화를 통해 실제 이주노동자들의 삶을 엿볼 수 있었겠지만, 그는 맹인 독거노인의 삶을 기록한 <어둠 속에서>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지 않았다. 비판적 사고가 가능한 대상일수록 자기검열로 인해 카메라 앞에서 의식적으로 행동하기 마련이므로 ‘진실’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덜 지적인 인물을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다큐멘터리의 모순을 포착한 감독은 오히려 다큐멘터리를 포기함으로써 다큐멘터리 작업과 그 촬영 대상들에 대한 존중을 표현하고 있다. <아이카> 속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감독의 시선 또한 현실과 대상에 대한 다큐멘터리스트의 윤리적 태도라는 입장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주노동자들의 형상과 그들의 주변 환경을 표현하기 위한 완벽에 가까운 사실주의적 접근법은 휘몰아치는 눈발 속에서 주황색 형광조끼를 입고 삽으로 눈을 치우는 이들을 촬영하기 위해 6 년간 겨울마다 적합한 촬영일자를 하염없이 기다리게 했을 뿐만 아니라 조연으로 섭외된 실제 이주노동자들이 촬영 중 본국으로 귀국해버리거나 불법체류 발각으로 본국으로 강제 송환되는 상황을 감내하게 하였다. 이주노동자의 형상이 섣불리 동정의 대상으로 제시되는 일도 없다. 다큐멘터리 감독 출신의 완벽주의 덕분이었을까. 키르기스 이주노동자 아이카를 연기한 카자흐스탄 배우 사말 예슬랴모바는 경이로운 몰입 연기로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의 영예를 안았다.
연민의 대상이 아닌 자본주의적 주체
<아이카>에서는 이주노동자의 삶에 실제로 카메라를 들이대는 일은 없다. 지극히 드라마틱한 전개를 따르고 있음에도 오랜 기간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온 감독의 내공으로 작품의 핍진성은 그대로 유지된다. 무엇보다도 아이카의 형상이 관객들의 정치적 올바름을 일깨우기 위해 연민의 대상으로 소모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출산 후 아이 얼굴 한 번 들여다보지 않은 아이카가 조산원을 탈출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자기 일자리를 가로챈 동포 여인의 머리채를 세면대에 처넣거나 자기가 빌린 돈 때문에 대부업자로부터 협박에 시달리는 동생에게 되레 소리를 질러대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가랑이 사이로 흐르는 덜 멎은 피를 닦아내거나 커다란 고드름을 따다가 천에 감아 배에 얹고 산욕열을 식히는 모습은 그녀에 대한 동정심을 넘어서 그녀의 강인함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게 한다. 일자리를 찾아 잰걸음으로 쉴 새 없이 눈길을 헤치는 아이카의 민첩한 보폭과 클로즈업된 발갛게 상기된 얼굴, 몰아쉬는 숨소리는 작품 진행 내내 추격물을 보는 것과 같은 긴장감을 유지시킨다. 감독은 관객이 아이카를 연민할 수 있도록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한다거나 시간적 여유를 두는 등의 편의를 제공하지 않는다.
아이카와 그녀의 상황은 이주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고정관념들을 기반으로 형상화되지 않았다. 여러 인터뷰에서 감독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이 영화는 러시아 내 키르기스 여성 이주노동자들이 조산원에 버려두고 가는 신생아가 모스크바 시내 조산원에서만 250명에 달한다는 한 뉴스 보도에 대한 감독 스스로의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중앙아시아 태생으로 이 지역 여성들이 지닌 전통적 사고방식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던 세르게이 드보르체보이 감독은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아이를 포기하게 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품었다. <아이카>는 감독 스스로 자신의 궁금증을 해소해 나가는 탐구과정의 산물이다.
사실, 대도시의 키르기스 여성 이주노동자들이 아이를 낳고도 포기하는 상황을 영화를 통해 처음 언급한 것은 그가 아니었다. 2010년대 초부터 이미 공론화되고 있었던 이 문제를 해당 국가인 키르기스스탄의 감독 누르벡 에겐이 <빈 집>(2012)에서 소재로 다룬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전통적 가치를 무시하고 서구적 삶을 동경하는 아셀의 모습을 강조함으로써 그녀가 아이를 포기한 이유를 방탕함에서 찾고 있다. 누르벡 에겐은 고향집을 ‘빈 집’으로 만들고 자신의 아이를 외국으로 팔아넘긴 동포 여인의 목숨을 갑작스레 빼앗음으로써 작품 전체의 주제를 명확히 한다. 이에 반해, 세르게이 드보르체보이 감독은 키르기스 여성 이주노동자들과의 인터뷰는 물론 그들의 공동체에 대한 세밀한 관찰을 통해 감독은 핍진성 있는 인물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하였다. 오염된 인물에 불과했던 아셀과는 달리 봉제 공방을 열겠다는 소망을 지닌 아이카는 자아발전을 통해 자본주의적 주체로 거듭나려는 의지를 지닌 인물로 제시된다. 이와 관련하여 아이카 주변의 러시아인 고용주의 경우 아셀을 오염시킨 방탕하고 탐욕스러운 인물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형상화되어 있다는 점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러시아인 고용주들 중 아이카를 타락시키거나 핍박하려는 목적을 지닌 인물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 또한 자본주의의 거대 시스템 속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수행하느라 아이카 만큼이나 분주한 삶을 사는 인물들로 그려지고 있을 뿐이다. 아이카 역의 사말 예슬랴모바의 연기는, 비록 난관에 봉착한 상태이기는 하지만 도전과 경쟁의 시스템을 살아갈 각오가 되어 있는 강한 투지의 인물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나은 삶을 찾기 위해 고국을 떠나온 이주노동자의 결심을 대변해주고 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빚을 갚을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아이카도 결국은 아이를 브로커에게 팔아넘기기로 한다. 이 점에 있어서 아이카의 선택은 아셀의 선택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전까지의 그녀의 고군분투가 단순히 연민을 자아내는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그녀의 마지막 결정 또한 비난의 대상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그녀와 함께 분초를 다투며 눈길을 질주해온 관객이라면 그것이 그녀를 구원할 가장 현실적인 ‘해결책’이라는 것을 의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영화는 예상 밖의 전개를 따른다. 아이를 받기 위해 조산원에 들른 아이카가 아이를 받아 안고 조산원 건물을 나서자마자 밖에서 대기 중인 브로커들을 피해 다시 도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는 허름한 건물에 숨어들어 아이에게 젖을 물린 아이카가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에서 끝이 난다. 직장 내 벽장 같은 공간에 살면서 아픈 자식을 돌보는 키르기스 출신 여인과 알고 지내기도 하고, 그녀를 대신 동물병원에서 임시직으로 있으면서 애완동물이 출산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하고, 차오르는 젖을 수시로 빈 그릇에 짜내기도 했지만 그러는 중 단 한 번도 자기 아이를 떠올렸던 적이 없었음은 물론 아이의 ‘효용’을 떠올리자마자 곧장 매매에 동의했던 아이카가 포대에 싸인 아이를 받아 안자마자 모성을 발동시키는 이 장면은 경이로운 반전이다. 모성이 부재한 것이 아니라 그저 아이를 안아볼 시간적 여유가 허락되지 않았을 뿐이었다는 이 예상치 못한 단순한 결론은 아이카에 대한 오해를 해소시키면서, 동시에 그녀의 이야기에 대한 공감대를 확장한다. 자본주의의 쳇바퀴 속에서 아이를 안아볼 시간이 없는 것은 비단 불법체류 노동자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 러시아 내 이주노동자 문제는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면서 앞서 언급한 영화들의 내용을 무색게 하고 있다. 마치 하산의 바람이 이루어지고 있기라도 하듯 이주노동자들의 본국 귀환이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연방통계청(РОССТАТ) 자료에 대한 대통령실 산하 러시아경제행정아카데미(РАНХиГС)의 분석에 따르면 이미 2014년부터 러시아로의 이주인구 증가율은 주춤하는 경향을 보여 왔으며 작년인 2018년의 경우 약 12만 5천명이 이주하여 포스트소비에트 역사상 최저치를 기록하였다. 게다가 분기별로 따지자면 이 수치는 일사분기를 제외하고는 2017년의 분기별 수치보다 모두 절반으로 급격히 떨어진 수치이다. 2016년 러시아연방이민국 폐지와 함께 그 업무가 2018년 내무부 산하로 최종 이관되면서 이민자들이 더욱 엄정화된 새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해 본국으로 귀환하게 된 상황을 고려하여야 하겠지만, 이는 무엇보다도 출입국관리행정의 계속적 실패와 악화하는 노동 및 거주 환경으로 인해 우크라이나는 물론 중앙아시아 CIS 국가들에게도 러시아가 오래 전부터 더 이상 매력적인 취업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을 뿐이다.
이 반전된 상황이 최근 들어 매스컴을 통해 공공연히 기정사실화되어 가고 있다. 중앙아시아로부터 노동인력을 공급받지 못할 수 있다는 러시아 노동시장의 위기감이 고조되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서는 청장년층 유출과 급격한 인구 고령화의 길을 걷고 있는 러시아의 미래가 중앙아시아 이주노동자 가족들의 유입과 정착, 이들의 출산율에 달려있다는 이야기다.
윤서현(verayoon430@gmail.com)은
서울대 노어노문학과의 강사이다. 모스크바국립대학에서 러시아문학사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강의와 번역, 드라마투르그 및 연극비평 활동을 겸하고 있다. “안톤 체홉의 『갈매기』에서의 예술테마”, “실패한 대화의 이면: 체홉 드라마의 대화 양상에 대한 통념과 이견” 등의 논문을 출판했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