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노벨’하면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고 노벨상을 제정한 알프레드 노벨을 떠올린다. 그러나 노벨 가문은 스웨덴에서 러시아로 이주한 뒤, 기계와 무기 생산부터 석유산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산업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알프레드 노벨의 두 형인 로베르트와 루드비그, 그리고 루드비그의 아들 에마누엘 노벨은 20세기 전후 세계적인 석유기업인 ‘노벨형제석유생산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러시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석유산업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전 세계에서 최초로 개발된 바쿠유전이 위치한 아제르바이잔은 여전히 석유산업이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다. 이글은 바쿠유전, 석유산업의 발전과 노벨 가문에 관한 글이다.
양승조(숭실대학교)
러시아 석유개발 역사는 바쿠 유전과 함께 시작되었다. 19세기에 코카서스 원정을 통해 카스피해 서남부지역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한 러시아 제국은 이 과정에서 당시 세계적 유전지대였던 바쿠 지역을 손에 넣었다. 그 결과 러시아 석유산업은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도 앞선 19세기 중반부터 발전하기 시작했으며, 미국 다음으로 많은 양의 원유와 정제유를 생산하고 수출하는 국가가 되었다.
당시 러시아가 석유 생산 대국으로 성장한 데에는 스웨덴 이주민 노벨 가문[1]의 역할이 컸다. 노벨 가 구성원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다이너마이트 개발과 노벨상으로 유명한 알프레드 노벨이다. 그러나 알프레드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와 형제들을 포함한 노벨 가문 구성원들은 주로 러시아를 무대로 큰 사업을 일으키고 운영했던 굵직한 사업가들이었다. 노벨 가문과 러시아 사이의 긴밀한 관계는 이주 1세대인 임마누엘, 그의 둘째 아들인 루드비그, 루드비그의 아들 에마누엘이 러시아로 귀화했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임마누엘 노벨 2세의 위 두 아들인 루드비그와 로베르트은 바쿠 유전 지대를 기반으로 거대한 석유 기업을 시작했으며, 나아가 이를 1917년 10월 혁명으로 볼셰비키 정권이 들어설 때까지 거대 기업 집단으로 성장시켰다
임마누엘 노벨 2세는 창의성이 풍부하고 재능 있는 기술자였다. 아버지인 임마누엘 노벨 1세는 군대에서 의무관(醫務官)으로 복무하다 제대 후 스웨덴 예블레(Gävle)에 있는 병원에서 의사로 일했으나, 경제적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노벨 2세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채 아직 어린 소년이었던 14세부터 3년간 선원 생활을 했다. 1819년에 그는 스톡홀름미술아카데미(Kungliga Akademien för de fria konsterna)에 입학해서 건축학을 전공했으며, 졸업 후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압착 롤러, 자동동력장치, 외과용 기계, 나무지뢰 등과 같은 독창적인 물건들을 만들어 판매했던 그의 사업은 좋은 성과를 보이지 못했으며, 몇 가지 악조건들 – 그 자신의 사업 경험 부족, 당시 침체되고 있던 스웨덴 경제 상황, 그의 재산을 앗아간 자택 화재 사건 – 이 중첩되면서 파산하고 말았다.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던 임마누엘은 우연한 기회에 당시 스웨덴에 파견 온 러시아 특사로부터 자기 나라에서 일해 보라는 권고를 받았으며, 이에 러시아로의 이주를 결심한다.
가족을 스웨덴에 두고 홀로 러시아에 온 임마누엘 노벨 2세는 이곳에서 자신의 재능을 사업으로 연계하는데 성공했다. 1837년에 임마누엘은 러시아 제국의 자치국이었던 핀란드 대공국(Великое княжество Финляндское)을 거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비롯한 주요 항구들을 보호하기 위한 무기로 기뢰에 관심을 가지고서 관련 연구자들을 지원하고 있었다. 1838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작업장을 개설한 임마누엘도 강력하고 안전한 기뢰 개발에 진력했다. 그리고 1842년에 오흐타강(река Охта)[2]에서 벌인 기뢰 폭발 시연에 성공함으로써, 임마누엘은 국가로부터 25,000은루블을 상금으로 받았으며, 관련 연구가 최종적으로 완료될 때까지 매일 25은루블을 급여로 지급받게 되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임마누엘 노벨 2세의 러시아 사업은 빠르게 성장했다. 국가로부터 받은 상금은 임마누엘이 스웨덴에서 진 빚을 청산하고, 사업을 확대하며, 스웨덴에 두고 온 아내와 아들들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데려오는데 사용할 수 있는 자금이 되었다. 그는 동업을 통해 자신의 작업장을 <오가료프와 노벨(Огарёв и Нобель)>기계공장으로 확장했다. 이곳에서는 천명이 넘는 노동자가 바퀴 만드는 기계, 기선용 증기기관 등 다양한 종류의 기계들과 선박을 생산했다. 1851년에 임마누엘은 공장에 대한 오가료프의 지분을 사들인 후 공장 명칭을 <노벨과 아들들(Нобель и сыновья)>로 변경했다.
1853년에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으로 시작된 크림 전쟁(1853-1856)은 임마누엘의 사업이 급격하게 확대되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군수품 주문이 폭증하면서 임마누엘의 공장은 전쟁 특수를 누릴 수 있었다. 실제로 임마누엘의 공장에서 생산된 기뢰는 크론시타트(Кронштадт) 요새[3] 주변 바다에 설치되어 영국과 프랑스의 군함들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진입하는 것을 막는데 실질적인 기여를 했다.
그러나 1856년에 크림 전쟁이 종결되면서 임마누엘 노벨 2세의 러시아 사업은 빠르게 쇠퇴하게 되었다. 전쟁 특수에 고무된 임마누엘은 국가에서 발주한 주문에 대처하고 더 많은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대출을 받아 생산 설비와 인력을 보충했다. 그런데 1856년에 크림 전쟁이 러시아의 패배로 종료되자 국가는 지출을 줄이는 한 방편으로 군비를 축소했는데, 이 과정에서 임마누엘의 공장과 맺었던 발주 계약들이 일방적으로 취소되었다. 1858년에 임마누엘의 회사는 극심한 재정 위기에 빠지게 되었으며, 마침내 1859년에 임마누엘은 회사 경영을 포기한 채 아내와 셋째와 넷째의 두 아들들과 함께 스웨덴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러시아에는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이 남아 회사를 정리했다.
임마누엘 노벨 2세의 셋째인 알프레드는 스웨덴으로 돌아가 강력한 폭발 물질인 니트로글리세린(nitroglycerin)을 안정적이고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에 매진했다. 1847년에 소브레로(Ascanio Sobrero, 1812-1888)가 만든 니트로글리세린은 당시 주로 사용되고 있던 폭약인 흑색화약보다 강한 폭발력을 보여주었으나, 물질 자체의 불안정성으로 인해 폭발성을 제어하기 어렵다는 문제점으로 인해서 상용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런데 1866년에 알프레드는 규조토에 흡수시키는 방식으로 니트로글리세린을 안정화시키는데 성공함으로써 다이너마이트라는 강력한 폭약을 만들어 냈다. 그는 세계 각국에서 다이너마이트 제조 방법을 특허로 등록하고, 이를 독점적으로 생산·판매함으로써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반면, 첫째인 로베르트와 둘째인 루드비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러시아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두 사람은 아버지가 사업에서 실패한 후 러시아에 남아 아버지 회사를 청산하는 작업을 했으며, 이것이 완료된 후에도, 이곳에서 각자 자신의 회사를 세워 운영하기 시작했다. 특히 기계·무기 부문에서 일을 시작한 루드비그의 사업은 매우 성공적으로 확장되고 발전했다. 루드비그는 1862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북쪽의 작은 도시에 <루드비그 노벨 기계공장(Механический завод. Людвиг Нобель)을 설립해서 다양한 종류의 금속 제품들과 기계들을 생산했다. 얼마 가지 않아 그의 공장에서 생산하는 물품들은 매우 좋은 평가를 받게 되었으며, 그 결과 국가에 공구, 무기 등과 같은 다양한 물품들을 납품하게 되었다. 루드비그의 공장은 이렇게 쌓은 기술과 자본을 기반으로 기계공장과 무기공장을 창설하고 인수함으로써 러시아 유수의 무기 생산 기업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당시 맏형인 로베르트는 헬싱키에서 램프와 등유를 생산하는 회사를 세워 운영하고 있었는데, 루드비그의 사업이 번창하게 되자 1870년에 동생의 사업에 동참하게 되었다.
임마누엘 노벨과 그의 아들들이 이주를 통해 경제적 성공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19세기 러시아 제국이 전쟁, 개혁 등과 같은 충격적 과정들을 겪으며 근대화와 산업화에서 빠른 성과를 거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세기에 접어들자 마자 러시아는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권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러시아군은 1812년에 프랑스군의 침공으로 시작된 조국전쟁(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4]에서 승리했으며, 이후 반 프랑스 동맹의 일원으로서 프랑스 제 1제정을 붕괴시키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이러한 활동을 기반으로 한때 러시아는 유럽의 파수꾼을 자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자부심은 크림 전쟁(Крымская война, 1853-1856)에서의 패배로 크게 훼손되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의 패배는 러시아 사회에 대한 개혁으로 이어졌다. 알렉산드르 2세는 러시아의 후진성에 대한 자성 속에서 1861년의 농노제 폐지 선언을 시작으로 재정개혁, 교육개혁, 행정개혁, 사법개혁, 군개혁 등을 연이어 진행했다. 개혁은 19세기 말 러시아에서 근대화와 산업화의 진전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 성장을 기반으로 러시아는 외부로의 영토 팽창에 다시 힘을 쏟기 시작했다. 서아시아와 인도로부터 북상하고 있던 영국·프랑스 세력에 맞서는 과정에서 코카서스 지역(캅카스 전쟁, 1817-1864)과 중앙아시아 지역(19세기 후반)을 정복했고, 동북아시아에서는 청으로부터 아무르강 이북지역(아이훈 조약, 1858)과 우수리강 연안지역(베이징 조약, 1860)을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노벨 가문의 러시아 사업, 그 중에서도 석유 개발 사업은 러시아 제국의 이러한 사회적·정치적 변화와 경제적 발전 속에서 진행되었다.
19세기에 세계 석유 시장을 지배한 것은 미국과 러시아였다. 상업적 석유 개발은 1859년에 에드윈 드레이크(Edwin L. Drake)가 충격식 시추법으로 유정을 굴착해서 원유를 대량 생산하면서 시작되었는데, 이때 이래로 19세기 말까지 미국과 러시아 외 지역에서 생산되는 원유량은 최소 2%에서 최대 8%에 불과했다. 당시 러시아는 코카서스 원정에 성공함으로써 바쿠 주변의 유전지대를 확보하고 있었다. 바쿠는 오랜 기간 동안 러시아 석유 생산의 핵심 지역 역할을 한 곳으로, 1930년대 이전까지 러시아산 석유의 80퍼센트 이상을 생산했다. 그러나 1860년대에 바쿠에서의 원유 생산은 그 양과 질에 있어 모두 미국에 크게 뒤쳐져 있었다. 이 당시 바쿠 유전 지대는 국유지였는데, 국가는 4년 단위로 일정 액의 임차료를 받고 이 땅을 임대했다. 그런데 이렇듯 임대기간이 짧았기에 유전개발자들은 시간과 비용이 많이 소요되는 본격적인 유전 시추 보다는 얕은 유정이나 구덩이를 파는 단순한 방법으로 원유를 채취했다. 이렇듯 바쿠 지역의 원유 생산 기술 수준은 매우 낮았으며, 이러한 이유로 바쿠 지역에서 생산된 원유는 양도 적었을 뿐 더러, 질도 낮았다. 생산된 원유를 수송하는 것도 쉽지 않아서, 철도망이 아직 구축되어 있지 않았기에 대량·급속 운송이 불가능했으며, 카스피해를 지나 볼가강으로 이어지는 수상 운송도 겨울철 볼가강 결빙 문제로 이동 가능 시기가 제한되어 있었다.
(단위: 백만 톤)
이러한 상황은 1870년대에 접어들면서 조금씩 개선되기 시작했다. 바쿠 유전은 당시 경쟁관계에 있던 미국 펜실바니아 산 원유에 비해 질이 떨어진다는 것이 단점이었으나, 원유 매장양이 풍부하고 유층(油層)이 지표면에 비교적 가까이 위치해 있다는 장점 또한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점에도 불구하고 바쿠 유전이 근대적인 방식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미국에 비해 많이 늦어서, 드레이크 보다 13년이 늦은 1872년에 두 개의 시추공을 뚫어 원유를 생산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상대적으로 늦은 출발에도 불구하고, 위 그래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 해를 기점으로 바쿠에서도 원유 생산량이 빠르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노벨 가문은 이렇듯 바쿠에서 석유 생산이 본격화하기 시작하는 시기에 이 지역에서 유전사업에 뛰어들었다.
노벨 가문 구성원 중에서 바쿠 유전 개발 사업에 뛰어든 것은 러시아에 있던 두 형제인 로베르트와 루드비그였다. 이들이 이 사업에 뛰어들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 1873년에 루드비그는 국가에 납품할 소총의 개머리판 제작에 사용될 호두나무 목재 구입을 위해 형을 코카서스 지역으로 보냈다. 코카서스 지역을 순행하던 로베르트는 이곳에서 원하던 목재를 발견하지는 못했으나, 바쿠에서 유전을 보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등유 사업을 해 본 경험이 있던 그는 석유 사업이 장래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목재 구입용으로 지니고 있던 돈으로 바쿠에서 소규모 유전 지역을 구매했다. 나아가 로베르트는 석유 개발 사업에 투자하도록 동생인 루드비그를 설득했다. 처음에는 망설이던 루드비그도 국가가 바쿠유전 지대의 토지를 민간에 판매하자 본격적으로 석유 개발 사업에 뛰어들게 되었다.
석유 개발 사업에 뛰어든 루드비그와 로베르트 형제는 원유의 생산, 정제, 운송을 체계화하는 작업에 힘을 쏟았다. 이 당시 바쿠에서 유전 개발은 기술적으로 낙후해 있었으며, 석유 시추에 필요한 기계나 장비, 철도, 유조선, 수송용 기름 저장 탱크, 지점망 등과 같은 시설들은 부족하거나 부재했다. 루드비그는 이러한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하며 석유 채굴, 생산, 운송, 정제 방식을 개선하고 일관화해 갔다. 이러한 노력을 보여주는 몇 가지 예를 살펴보면, 1878년에 루드비그는 세계 최초로 유조선(증기선 <조로아스트르(Зороастр)호>)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같은 해에 러시아 최초로 석유 파이프 라인을 건설했으며, 1903년에는 세계 최초로 디젤 엔진을 사용하는 유조선(<반달(Вандал)호>)을 도입했다.
그런데 이러한 작업들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많은 자금이 필요했기에, 루드비그와 로베르트는 당시 이미 세계적 수준의 대 사업가로 성장해 있던 알프레드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 결과 1879년에 노벨 삼형제, 그리고 루드비그의 동료이자 친구인 P. A. 빌데를린그(Пёт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ильдерлинг, 1844-1900)를 비롯한 7명의 외부인사들이 투자자로 참여하는 노벨형제석유생산주식회사(Товарищество нефтяного производства братьев Нобель), 약칭 브라노벨(БраНобель)이 설립되었다. 브라노벨의 대표직은 초기 자본금 중 50퍼센트 이상을 댄 루드비그 집안에게 돌아가서,[5] 1879-1888년까지는 루드비그가 맡았으며, 1888년에 그가 사망한 후에는 그의 아들인 에마누엘(Emanuel Nobel, 1859-1932)에게 승계되었다.
창설 이후 브라노벨은 자본투자를 통해 기술개발과 설비 구축을 지속함으로써 원유생산량을 크게 늘려갔다. 브라노벨의 원유생산량은 1879-1880년에 919,000푸드[6]에 불과했으나, 10년 후인 1889년에는 31,920,000푸드로 35배 성장하며, 다시 10년 후인 1899년에는 93,428,000푸드로 1880년 대비 101배 이상 증대하며 정점에 이르렀다(30 лет деятельности, 1914: 65, 69). 또한 브라노벨이 도입한 석유 생산 및 정제 관련 혁신은 이 분야의 다른 러시아 기업들로도 확산되었다. 그 결과 러시아 총 산유량 자체가 크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를 기반으로 1880~1890년대에 러시아는 산유량에 있어 미국을 빠르게 추격할 수 있었으며, 마침내 1898-1901년의 기간 동안에는 잠시나마 미국을 앞지르게 되었다.
원유 생산과 정제에서의 경쟁력 향상은 원유를 정제한 상품인 등유의 생산과 판매에도 영향을 미쳤다. 근대적 석유 채굴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860년대에 등유 시장을 주도한 것은 미국이었다. 아직 내연기관이 개발되어 있지 않았던 당시 상황에서 원유 정제물을 사용하던 가장 크고 거의 유일한 시장은 램프용 기름 시장이었는데, 등유는 원유 정제유들 중에서 이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생산물이었다. 누구보다 앞서 대량 원유 생산을 시작한 미국은 당시 램프용으로 각광받고 있던 등유 시장을 선점할 수 있었다. 즉, 1860년대에 미국산 등유는 미국 국내는 물론이고 유럽 등 해외에서도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미국과 함께 주요 산유국의 위치를 점하고 있었으나 이 시기에는 아직 채굴량이 많지 않았던 러시아 역시 국내산 등유로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 미국산을 수입하고 있었다. 그런데 브라노벨의 등장 이후 산유량이 급증하고 정제 기술이 발전하게 되면서 러시아 등유 시장에서 바쿠산이 미국산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브라노벨의 급격한 성장은 당시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 석유 시장을 지배하고 있었던 록펠러의 스텐더드석유회사(Standard Oil Company)의 이해관계와 충돌하게 되었다. 평범한 경리에서 시작한 록펠러는 모험적이고 공격적인 투자와 사업 경영을 통해 빠른 시간 내에 미국 석유 산업계를 장악한 후, 이를 트러스트로 조직한 스텐더드석유회사를 창설했다. 스텐더드석유회사는 공격적인 경영을 통해 미국 국내 시장은 물론이고 유럽을 비롯한 세계 시장에서도 지배적인 위치에 올라서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시기에 바쿠를 중심으로 성장한 브라노벨이 러시아 시장은 물론이고 유럽과 아시아에서도 스텐더드석유회사와 경쟁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위협을 느낀 록펠러는 1880년대 초에 브라노벨의 인수를 시도하나 노벨 형제의 거부로 실패하며, 그 결과 유럽 시장을 중심으로 두 석유 기업 사이의 경쟁은 심화되었다.
이에 록펠러는 브라노벨에 자금을 융통해주고 있던 로트실트(로스차일드) 가문과 협력 관계를 맺음으로써 브라노벨을 재정적으로 압박했다. 이를 기화로 로트실트는 러시아 석유회사인 <바투미석유생산판매회사(Батумское нефтепромышленное и торговое общество)>를 인수하여 <카스피해-흑해석유생산판매회사(Каспийско-Черноморское нефтепромышленное и торговое общество)>로 재조직함으로써 러시아 석유사업에 대한 직접 투자에 나섰다.
그러나 브라노벨은 이러한 어려움들을 이겨냈다. 먼저, 루드비그는 동생인 알프레드로부터 직간접적인 재정 지원을 받게 됨으로써 자금 문제를 극복할 수 있었다. 또한 자금 투자와 기술 혁신을 통해 러시아 석유 생산 및 판매 분야에서 브라노벨은 주도적인 입지를 확고하게 다질 수 있었다. 러시아 등유 시장에서 브라노벨의 입지는 수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브라노벨은 회사 창설 이후 1879-1883년 사이에 등유 생산량을 무려 2,090% 증가시켰다. 그리고 다음 단계에서는 브라노벨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 내 다른 석유 기업들에서도 등유 생산량이 급증해서, 1884-1888년의 5년 사이에 러시아 전체 등유 생산량은 430%라는 전에 없는 성장률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생산량 증대를 기반으로 러시아 등유 시장에서 브라노벨의 중요성은 지속적으로 커져서, 국내 시장 통제력이 1880년대 말에는 30%대, 1890년대에는 40%대, 1900년대에는 50% 전후로 확대되었다(Дьяконов, 1999: 172-173). 이러한 성장의 결과, 브라노벨은 스텐더드석유회사와 세계 석유시장을 양분하는 굴지의 기업이 되었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러시아 제국은 국내 정치 혼란과 국제 정치에서의 실패로 국력이 약화되고 있었으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석유 생산량에서 미국에 급격하게 뒤쳐지기 시작했다. 미국이 석유 생산량에서 러시아와 커다란 차이를 벌리게 된 것은 새로운 시추 기술 개발과 새로운 유전 발견 덕이 컸다. 먼저, 1901년부터 미국에서는 특수 송곳이 달린 강관을 사용해서 유층을 뚫는 회전식 시추법을 사용함으로써 지층 깊은 곳에 있는 유전도 시추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기존 유전 지대인 펜실베니아 지역 외에도 텍사스와 오클라호마에서 대규모 유층이 발견되어 개발되기 시작함으로써 유전지대의 양 자체가 급증했다.
반면, 20세기 초에도 러시아는, 기술적으로는, 여전히 지층에서 가까이 위치한 유층에서만 시추할 수 있는 충격식 시추법을 사용하고 있었고, 새로운 유전 개발이라는 측면에서는, 여전히 바쿠와 그 주변의 구 유전 지대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브라노벨은 이 중 후진성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1911년에 로터리 굴착기를 도입하고 엔지니어를 초빙하는 등 기술 개선 작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추 비용 증대로 이어져 원유와 정제유 가격의 상승을 가져와서, 러시아 등유 가격은 주요 경쟁 상품이었던 도네츠크(Донецк) 산 석탄 가격의 두 배에 달할 정도로 상승했다. 그 결과 러시아산 등유는 국내 시장에서 경쟁력이 약화되어 가게 되었다.
국내 정치 문제와 사회 불안 또한 석유 산업 발전에 악영향을 끼쳤다. 1905년에 혁명적 상황이 조성되었을 때 바쿠 지역에서도 폭동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이 지역 석유 노동자들이 주동이 되어 열악한 노동 조건에 대한 개선을 요구하며 일으킨 봉기였다. 폭동은 석유 생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서, 러시아 원유 생산량은 1904년에 10,908,000톤에서 1905년에는 7,600,000톤으로 급감했다. 이후 생산량은 조금씩 회복되나 1905년 수준을 회복하지는 못했다. 그러다 1917년에 발생한 두 차례의 혁명들과 그 중 10월 혁명으로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서면서 러시아 원유 생산량은 급감해서, 1916년에 9,141,000톤에서 1917년에는 8,760,000톤으로, 그리고 1920년에는 3,830,000톤으로 추락했다. 이러한 급감 이후 러시아 원유 생산량은 1928년에 가서야 다시금 회복되기 시작했다. 1888년에 루드비그가 사망한 후 경영권을 인수한 그의 아들 에마누엘은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20세기 초 러시아의 어려운 경제적·경제외적 조건들 속에서 브라노벨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실제로 브라노벨의 경영실적도 나쁘지 않아서, 루드비그 시기는 물론이고 에마누엘이 경영할 때에도 브라노벨의 국내 시장 점유율과 총이익 및 순이익은 전반적으로 증가 추세에 있었다(Дьяконов, 1999: 171-172, 179-180). 노동자 문제에 있어서도, 러시아 석유 사업가들 중에서 루드비그와 에마누엘은 노동자 복지에 매우 신경을 쓰는 편이었는데, 특히 1905년에 바쿠 석유 노동자 폭동이 발생한 이후에 에마누엘은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아동노동을 금지하며 직원들에게 회사 지분을 분배하는 등 노동 조건과 노동자 복지 향상에 더 많은 힘을 쏟았다. 그러나 1917년 10월에 발생한 국가적 차원의 격변은 이 모든 노력들과 시도들을 무위로 만들었다. 1918년에 브라노벨은 러시아 내에 있던 다른 석유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국가에 몰수되었으며, 에마누엘과 그의 가족은 스웨덴으로 이주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스웨덴 출신의 노벨 가문은 러시아와 인연을 맺으며 경제적 성공과 사회적 명성을 획득했다. 1대인 임마누엘 노벨 1세는 러시아에 이주해서 시작한 기계 및 무기 사업을 통해 스웨덴에서의 실패를 만회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사업 경험을 기반으로 2대에 속하는 세 아들은 서유럽과 러시아에서 거대한 기업을 일구어 냈다. 특히, 알프레드 노벨에 가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의 형들인 로베르트와 루드비그는 그들의 아버지처럼 러시아에서 사업을 시작해서 커다란 성공을 이루었다. 특히 루드비그는 바쿠를 기반으로 석유 사업을 시작해서 러시아 원유 시추와 정제를 선도하는 대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이렇게 건설된 노벨가의 러시아 석유 제국은 3대인 에마누엘에게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이러한 노벨 가문의 러시아 사업은 19세기 당시 급격한 변화를 겪고있던 러시아 제국의 상황과 연동되어 있었다. 19세기 후반에 러시아 제국에서 진행된 개혁, 경제성장, 군비증강과 같은 조건 속에서 노벨 가문의 사업은 확립되고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어 진행된 노쇠한 제국의 급격한 붕괴를 노벨 석유 제국은 버텨낼 수 없었다. 1917년에 발생한 혁명은 구체제를 무너뜨렸으며, 이와 함께 3대에 걸친 노벨 가의 러시아 이주 생활과 2대에 걸친 거대 석유 기업에 종료를 선언했다.
양승조(igory21@gmail.com)는
숭실대학교 조교수이다. 모스크바국립대학교(Lomonosov Moscow State University) 역사학부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고려대학교 러시아CIS연구소에서 HK연구교수와 연구교수로,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에서 선임연구원으로 활동했다. 근대 러시아 사회경제사, 근대 러시아·중앙아시아 민족문제, 근대 러시아·중앙아시아 종교문제, 근대 러시아 이주사, 러시아·중앙아시아 고려인 문제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18세기 말-19세기 중반 제정 러시아의 대 카자흐 정책과 이슬람 – 오렌부르크이슬람종무원을 중심으로”(2017) 외 다수의 저서 및 논문을 출간했다.
[1] 러시아에서 석유 제국을 건설하게 되는 노벨 가문은 임마누엘 노벨 2세(Immanuel Nobel den yngre, 1801-1872)로부터 시작되었다. 임마누엘 노벨 2세의 친가는 스웨덴 최남단에 위치한 외스트라 뇌벨레브(Östra Nöbbelöv)라는 마을에 거주하던 농민 집안으로, 원래는 성씨가 없었다. 그러다 임마누엘의 증조부인 페터 올라프손(Petter Olofsson, 1655-1707)이 웁살라 대학에 입학하면서 라틴어 성명을 대학에 제출할 때 자신의 출신 마을 명칭을 넣어 라틴어식으로 페트루스 노벨리우스(Petrus Nobelius)라고 표기하여 성씨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노벨리우스라는 라틴어식 성씨 표기는 그의 아들에게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이 성씨는 그의 손자 대에서 다시 얼마간 변형을 겪게 된다. 페트루스의 손자녀 중 막내인 임마누엘은 군복무를 하게 되면서 성씨를 스웨덴어식인 노벨(Nobell)로 바꿨으며, 이후 여기에서 다시 마지막 “l”도 떼어 버렸는데, 그가 임마누엘 노벨 1세(Immanuel Nobel den äldre, 1757-1839)이다(프리츠 푀크틀레, 2000: 11-15). 임마누엘 노벨 2세는 이렇게 노벨이라는 성을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임마누엘 노벨 1세의 동명 아들이다.
[2] 오흐타강(река Охта)은 네바강(река Нева)의 지류로, 상트페테르부르크 북동쪽에서 발원해서 남쪽으로 흘러 네바강에 합류한 후 발트해로 나간다.
[3] 크론시타트(Кронштадт)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서쪽으로 나 있는 핀란드만 입구에 위치한 코틀린(Котлин)섬에 건설된 러시아 제국 시기의 군항이자 요새이다.
[4] ‘조국전쟁(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은 러시아에서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 대항해서 싸운 전쟁을 일컫는 명칭이다.
[5] 브라노벨의 초기 자본금은 3백만 루블이었는데, 이 중에서 루드비그의 투자금은 161만 루블이었다(30 лет деятельности…, (1914): 49).
[6] 푸드(пуд)는 러시아의 전통적인 무게단위로, 1 푸드는 16.38킬로그램이다.
[7] 도네츠크(Донецк[러])는 현 우크라이나 도네츠크(Донецьк)로, 석탄 산지로 유명하다.
참고문헌
*본 기고문은 전문가 개인의 의견으로,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와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