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공산 국가들 중 중동부 유럽 국가들과 구 소련 국가들 간 체제전환 이후 발전 과정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특히, 카자흐스탄은 체제전환 당시 러시아에서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급진적 체제전환 방식을 그대로 모방하였다. 그 결과 카자흐스탄에는 관료 출신의 과두계급인 ‘올리가르히’ 층이 형성되었으며, 국가의 부가 이들을 중심으로 집중되었다. 이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과 올리가르히들은 1995년 개헌, 대통령 중심의 자본가 계급 창출 등으로 길항을 겪었고, 2005년 경제의 재중앙집권화, 2008년 글로벌 경제 위기로 기존 자본가들이 몰락하고, 非 카자흐 민족 대 자본가들이 지배 엘리트 내 한 축을 이루게 되었다. 향후 서구권에서 유학한 엘리트 2세대가 귀국하였으나, 여전히 나자르바예프 대통령 중심으로 구축된 자본가 계급은 국가 권력의 변화가 없는 한 정경유착과 그로 인한 국가 자산의 독점 및 부의 공정한 분배, 민주주의 문제 등에 대한 논란은 계속될 전망이다.
정재원(국민대학교)
탈공산 국가들 중 중동부 유럽 국가들과 구 소련 국가들에서의 체제전환 이후 발전 과정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확연한 차이들을 보이고 있는데, 특히 자본가 계급 등 체제전환 이후 새롭게 형성된 지배 계급의 재구성과 발전 과정의 차이는 상당히 크다. 구 소련 지역들에서는 공히 대통령과 그 일가에 대한 충성 경쟁을 통해 권력을 획득하고 이를 바탕으로 막대한 국가의 부를 독점하려는 약탈적 지배 계급이 형성되었는데, 이들은 국가의 모든 주요 정책 결정 과정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여론까지 통제함으로써 자신들의 지배를 관철하고 있다.
이들 국가 중 카자흐스탄은 체제전환 당시 러시아에서의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체제전환 모델, 즉 급진적 체제전환 방식을 그대로 모방하여 실시했다. 그러나 러시아보다 더 높은 수준의 대외개방정책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관료와의 연속성을 갖는 ‘올리가르히’로 불리는 체제전환기 국가 특유의 과두지배계급에게 모든 국가의 부가 집중되는 결과를 가져 왔다.
특히 1990년대 중반 이후 크게 강화된 나자르바예프 일가로의 정치권력의 집중, 그리고 그 일가로의 종속 관계의 강화 등으로 인해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자본가 계급으로서의 발전은 크게 저해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자본가 계급은 사유화 과정을 통해 형성되기 시작해 지금까지 나름대로 발전되어 온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까지도 강력한 권위주의 국가의 통제 하에서 독자적인 계급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옛 소비에트 권위주의 국가들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주요 정치 엘리트들은 여전히 국영 기업이나 사기업의 소유주거나 경영자도 겸직하는 경우가 많아 정치 엘리트와 경제 엘리트 간의 경계가 불확실한 경우가 많다. 거꾸로 말하면, 아직 정치 엘리트와 경제 엘리트의 분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거나 독자적인 경제 엘리트의 형성이 매우 더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후견주의에 입각한 권위주의 정권이 사실상 일당 독재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카자흐스탄과 같은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경우 정치엘리트와 경제엘리트는 뚜렷이 구별되지 않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Roberts, 2007)
뿐만아니라, 정치 엘리트와 행정 관료 엘리트들을 구분하는 일반적인 논의와는 달리, 카자흐스탄에서는 대통령 1인에게 막대한 권력이 집중되어 있어 행정 관료 엘리트들의 전문적 권한이나 독자적 영역이 크게 축소되어 있는 상황이며, 정치 엘리트의 명령을 집행하는 역할로 축소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 일가를 정점으로 하는 정치엘리트가 경제엘리트를 겸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때로는 행정 관료 엘리트까지 겸하고 있는 일부 집단들의 경우 전통적 행정 관료 엘리트의 역할과는 다른 방식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는 점도 강조될 필요가 있다.
소련 시기 카자흐스탄의 정치, 경제 엘리트들은 전통적으로 민족, 부족, 씨족, 지역적 연고를 기반으로 권력을 유지 확대하기 위해 경쟁과 협력, 그리고 균형을 추구해 왔다. 소련 붕괴 및 독립 직후에는 지역과 혈연 등에 기반을 둔 쥬즈 세력과 이에 기반한 구 소련 관료들, 그리고 소비에트 연방의 주요 민족이었던 러시아인을 중심으로 하는 비 카자흐, 슬라브계의 영향력이 막대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체제전환 이후 소유에 기반한 계급의 형성이라는 조건의 변화 속에서 옛 지배 엘리트 구조는 필연적으로 변화를 예고했다. 이제 엘리트 집단들 간의 경쟁과 협력, 혹은 균형의 전제 조건들이 전통적인 정치권력으로의 접근 가능성의 정도가 아니라 자본 소유와 같은 경제적 이권으로의 접근 가능성의 정도에 따른 것으로 근본적으로 변화함에 따라 그 구성은 물론 지배 메커니즘까지 크게 변화하게 되었다.
소련 시대 말 쥬즈들 간의 합의로 나자르바예프 현 대통령이 카자흐스탄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는데, 소련으로부터의 독립 이후 극심한 총체적 혼란기적 상황 속에서 이는 곧 지역에 기반한 전통적인 각 쥬즈들 간의 갈등과 중앙 권력에 대한 도전, 그리고 지역주의의 확산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특히 소련 말기에 시행되었던 경제 개혁은 지역 쥬즈 세력들의 영향력을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 왔는데, 실제로 석유 가스 자원이 몰려 있는 부유한 지역들의 경우 외국인 투자의 유치, 지역 개발 정책 등의 시행 시 쥬즈를 기반으로 하는 지역 토호들의 영향력은 막대했다. 이들은 중앙 정부가 자신들의 부를 탈취한다는 식의 불만을 종종 표출해 왔다(Cummings, 2000).
이러한 불만은 정치적으로도 표출되어 이 시기 카자흐스탄의 정당 정치는 이념과 정책이 아닌 각 쥬즈를 기반으로 하는 지역주의적 이해를 추구하는 등 크게 왜곡된 형태로 나타났다. 그러나 나자르바예프는 먼저 옛 엘리트 집단들 간의 견제와 갈등 등을 교묘히 이용하여 이들 간의 충성 경쟁을 이끌어냄과 동시에 새로운 엘리트 집단들을 적극적으로 양성했으며, 무엇보다 러시아인 외에도 다양한 비 카자흐 소수민족들을 엘리트 집단들 내에 적절하게 지원, 배치함으로써 씨족과 민족 등의 갈등을 무마시키는 데 성공했다. 특히 새로운 엘리트 집단들과 타 민족 엘리트 집단들에게도 이들이 국가의 자산에 접근할 수 있도록 허용하면서 그 대신 이들의 충성을 요구하는 ‘후견주의적’ 관계들을 적재적소에 형성해 놓았다.
무엇보다 이제 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과 사유화, 카자흐화 정책이 시행되는 과정 속에서 석유 가스를 중심으로 하는 광물 에너지, 금융, 미디어 부문을 중심으로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지배 집단들이 형성되었는데, 권위주의 레짐의 정점인 나자르바예프 일가는 사유화 과정 속에서의 부의 배분 등을 통해 자신에게 충성하는 엘리트 집단들의 재편을 가져 왔다. 즉 나자르바예프와의 관계의 밀접성 정도가 이들 새로운 지배 집단들의 경제적 부와 정치적 권력의 원천이 되는 소위 정치적 보호와 경제적 이익의 확보가 결합된 새로운 후견 네트워크가 형성된 것이다. 이제 전통적인 혈연이나 씨족을 기반으로 하는 지역 세력이나 러시아인을 비롯한 비 카자흐 민족의 지배를 크게 약화시키게 된 것이다(Sapaev, 2007).
체제 전환기의 극심한 경제의 침체 속에서 자신의 권력을 상실할 것을 두려워했던 나자르바예프는 재빨리 이러한 정치적, 경제적 혼란기를 틈타 소비에트 시기에도 없어지지 않았던 전근대적 통치 방식을 다시 도입함으로써 자신의 권력과 경제적 특권을 공고화하는데 성공했다. 먼저 나자르바예프는 러시아의 옐친의 소위 체제전환 방식을 그대로 모방하여 급진적 체제전환 방식인 소위 ‘충격 요법’을 카자흐스탄에서도 실시했다. 카자흐스탄은 가격자유화와 사유화라는 두 가지 핵심전략을 바탕으로 하는 급진적 체제전환 방식을 선택했다.
이러한 체제전환 프로그램들 중 특히 사유화 과정을 거치면서 다양한 소유 계급이 등장하였고, 체제전환의 혼란기 속에서 이 시기 특유의 새로운 형태의 지배 계급이 형성되었다. 즉 주택 사유화를 포함한 소규모 사유화로 한정되었던 1단계 사유화(1991-1992), 농업사유화를 포함한 사유화 확대를 도모했던 2단계 사유화(1993-1995), 그리고 사안별 사유화 및 외국인 투자 허용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3단계 사유화(1995-1997)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시장경제체제이자 자본주의적 계급사회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 결과 1997년 즈음에는 3,000여 개의 중대규모의 기업들을 포함해 18,500개 이상의 기업이 사유화됨으로써 소유를 바탕으로 하는 다양한 소유 계급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유화 과정은 부정과 부패가 난무하였고, 이러한 사유화 과정은 정보력에서 월등한 위치에 있었던 구 공산주의 노멘클라투라 집단들의 자본주의 지배계급으로의 변신, 그리고 권위주의적 국가의 강화와 맞물려 능력 있는 새롭고 독자적인 자본가 계급의 형성이라는 원래의 목표와는 다른 결과를 낳고 말았다. 결국 2000년대까지 국가 소유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던 농업 부문을 제외한 거의 모든 서비스 분야를 사유화한 결과, 체제전환기 특유의 정치와 경제 영역을 망라한 소위 과두지배계급인 ‘올라가르히’ 집단이 형성되었다.
불법적으로 터키나 이란 등지로부터 수입한 원자재 등을 다시 중국이나 중동 등지로 되팔아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헐값에 사들인 국유 기업들 중 채굴 산업을 기반으로 알렉산드르 마쉬케비치(Aleksandr Mashkevich), 무흐타르 아블랴조프(Mukhtar Abliyazov), 누르잔 수브한베르딘(Nurzhan Subkhanberdin), 라하트 알리예프(Rakhat Aliyev) 등으로 상징되는 올리가르히들의 독자적 계급으로 발전하려는 움직임은 금융위기가 발생한 1998년도까지 절정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Peck, 2006).
또한 매우 흥미롭게도 러시아와는 달리, 이 시기 카자흐스탄 정부는 석유 가스 부문을 중심으로 해외자본의 투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텡기즈 유전 개발 등에 있어서 세브론(Shevron)이나 엑손모빌(ExxonMobile)과 같은 서구의 초국적 석유가스 자본들과의 세기적인 계약들이 체결되기도 하는 등 해외 자본가들의 영향이 막대해진 특징을 갖게 되었다. 이렇듯 심지어 해외 자본가들까지 국가 경제를 좌지우지하게 되었던 이 시기에는 아직 대통령 일가는 여러 행위자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1995년 대통령 일가의 권한 강화를 요지로 하는 신헌법이 채택됨으로써 자유주의적 정치세력은 물론 민족주의, 이슬람주의, 친 러시아적 정치세력들은 급속하게 그 세력이 약화되었고, 의회의 자율성도 크게 제약을 갖게 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대통령 권력을 보좌할 새로운 기구들이 창설되었고, 점차로 선출직 관료 기구들은 폐지되었다. 유력한 야당 후보였던 전 총리 아케잔 카제겔딘(Akezhan Kazhegeldin)이 추방되었고, 이제 씨족이 아닌 직계 혈육을 중심으로 하는 대통령 일가의 국가 주요 경제 부분의 장악이 시작되었다(Olcott, 2002).
이 과정 속에서 일부 올리가르히들의 경제 영역에서의 저항도 나자르바예프 일가에 의해 분쇄되었다. 먼저 교통, 통신, 그리고 소비재 산업 등을 통제하고 있던 무흐타르 아블랴조프(Mukhtar Abliyazov)로 상징되는 올리가르히 집단은 그가 주도했던 카자흐스탄 민주 선택 당에 대한 탄압 속에서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Bukkvol, 2004). 다음으로 건설과 농업 등의 부문을 통제하고 있던 자만벡 누르카딜로프(Zamanbek Nurkadilov)로 상징되는 다른 올리가르히 집단도 나자르바예프가 외국 석유 기업들과의 계약 과정 속에서 막대한 부정부패를 저질렀다고 고발을 했으나, 이후 누르카딜로프가 암살을 당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올리가르히들의 저항은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시장경제체제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은 아니지만 소련 붕괴 직후 곧바로 시행되었던 사유화 과정에 대한 강력한 비판적 여론이 형성되었다. 즉 충격 요법으로 상징되는 서구 자본의 이해가 관철되었던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급격한 체제전환 방식으로 인해 국가의 자원 통제력이 약화되었고, 이러한 국가 권력을 흔들어 국부 약탈 및 유출에만 관심이 있는 국내/외 올리가르히 계급의 대두로 인해 정치적 혼란이 가속화되었으며,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전적으로 유리한 투자 환경을 만들어 이들로 하여금 자국의 정치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국가의 약화와 국내외 적들(외국자본가 및 국내 올리가르히)과의 충돌이라는 담론을 통해 카자흐스탄 정치 엘리트로 하여금 국가자본주의 혹은 자원민족주의로의 회귀를 위한 토대로 작동하게 되었다(Domjan & Stone, 2010)
이러한 논리에 따라 이제 국가는 석유와 가스 분야에 있어서 기존의 신자유주의적 개방 정책 기조와는 완전히 다른 정책 전환을 주도하기에 이르렀다(Ostrovski, 2010). 그 첫 작업은 석유 가스 부문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 통제 하 자본가 계급 창출이었다. 2001년 카자흐스탄 정부는 석유 가스 수송 분야를 다룰 독점적 기업을 창설했다. 즉 카즈트란스가스(KazTransGas)사와 카즈트란스오일(KazTransOil)사라는 두 기업을 합병한 트란스네프티&가스(TNG)라는 거대독점 기업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듬해인 2002년에는 다시 TNG와 카자흐오일(KazakhOil)사가 합병하여 카즈무나이가스(KazMunayGas)라는 거대 독점 국영기업이 탄생했다. 그리고 2004년 정부는 카즈무나이가스 사가 카자흐스탄 내 모든 석유와 가스 프로젝트를 독점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이러한 소위 국가 경제 자산의 재국유화 혹은 재집중화는 국내 정치 과정의 변화가 야기한 측면도 크다. 즉 지배 엘리트 내 반反 나자르바예프 정치세력의 결성이라는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함으로써 이러한 과정이 강화된 측면이 있는 것이다. 즉 철저하게 정권에 복종해 오던 일부 관료들, 정치인들, 그리고 올리가르히들의 동맹이 갑자기 카자흐스탄 민주 선택 당(The Democratic Choice of Kazakhstan)이라는 야당을 조직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는 카자흐 민족주의 집단들, 이슬람주의 집단들, 러시아 소수민족 집단, 친서구 자유주의 집단들을 무력화시키는 데에 집중해 왔던 나자르바예프 정권에게 매우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바로 이 사건 이후 나자르바예프 일가는 올리가르히들이 정치적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토대로서 이들이 과도한 부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지하고, 이들이 경제적 토대를 바탕으로 완전한 물질적 독립성을 확보한 후에는 대통령 일가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정치세력으로 등장할 가능성을 차단하는 데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2000년대 이후에는 한 편으로는 정치, 경제 엘리트들 집단 내 잠재적 반대 세력들에 대한 관리, 통제와 동시에 한층 더 협소한 대통령 일가들의 국부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는 조치를 적극적으로 취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정치와 경제 영역 모두 국가정보기관인 카자흐스탄 국가안보위원회(Kazakhstan’s National Security Commitee, KNB), 관세위원회, 금융 경찰, 국경 수비대, 대통령 경호실 등 소비에트 시절부터 강고하게 형성되어 왔던 국가 물리력 기구를 중심으로 다시 중앙의 강력한 통제를 받게 되었다. 특히 KNB와 대통령 경호실에서의 근무를 기반으로 했던 나자르바예프의 첫째 사위인 알리예프의 예에서 보듯, 바로 이러한 기구들은 거의 모두 씨족(clan) 대표가 아닌 대통령 일가의 측근들이 장악을 함으로써 권력을 한층 더 공고화했다.
먼저 나자르바예프 일가는 경제 관료 엘리트 그룹을 조직했다. 그 방식은 바로 국가 전략 산업 분야인 석유, 가스 분야를 중심으로 거대한 펀드를 조직하는 것이었다. 총리 마시모프가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는 삼룩-카지나 펀드의 핵심인물은 둘째 사위인 티무르 쿨리바예프인데, 그는 민간 자본가이면서도 국가의 주요 직책들을 맡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 외 이사회 임원들과 경영진들은 총리 마시모프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구성원들의 민족이 카자흐인이라는 특징이 있다. 정상적인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들은 재계 관료집단으로 분류됨으로 자본가 계급이라고 보기 어렵지만, 사적 영역과 국가 공공 영역에서의 권력을 겸하는 경우가 많은 카자흐스탄에서는 넓은 의미에서 자본가 계급의 역할도 하는 경제 엘리트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거대 펀드 조성 방식은 사기업들로 하여금 자신의 주식 일부를 국가에게 팔도록 강제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산업 분야별 자산들을 재조정해서 거대한 국가 기업들 창출하도록 하는 러시아식 모델에 따른 것이었다. 대통령령에 따라 2008년 카자흐스탄 정부는 삼룩(Samruk)과 카지나 지속개발펀드(Kazyna Sustainable Development Fund) 등 두 개의 주요 펀드를 합병하여 투자에서 국가의 통제가 한층 더 강화된 삼룩-카지나 펀드(Samruk-Kazyna fund)를 만들었다(Kemme, 2011).
현재 이 펀드는 총 780억 달러에 이르는 자산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카자흐스탄 전체 GDP의 거의 60% 정도에 해당하는 금액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펀드는 400여 개에 달하는 회사, 국가 연구소, 법인 등을 소유하고 있거나 일부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등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석유와 가스 분야는 물론, 광산, 화학공업, 통신, 교통, 개발 금융, 은행업, 부동산 등 거의 모든 영역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펀드를 주도하는 경제기술관료 집단은 카자흐스탄의 후견주의 레짐(regime)의 중요한 구성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들 중 고위 관료들은 대통령과 직접적인 접촉이 가능한 이들로서 공공재들을 여러 부문에 할당할 수 있는 막대한 행정적 권한들을 갖고 있으며 중앙은 물론 지역의 주요 인사들의 인사 이동이나 임명 해임 등을 좌우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특히 올리가르히 집단들은 대통령과의 직접적인 채널을 갖고 있는 이들 고위 관료들과의 후견적 네트워크 없이는 자본가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다.
또한 거꾸로 이들은 공식적으로는 올리가르히들의 기업들에 이사진으로서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을 뿐 아니라, 비공식적으로도 뇌물이나 친인척들의 취업 등 다양한 방법으로 그 이상의 혜택과 수입을 올리고 있다. 대통령 일가와 올리가르히, 그리고 이들 기술 관료들 간의 전략적 동맹 관계 혹은 이들 사이에 벌어지는 이익을 둘러싼 경쟁 구도의 변화에 따라 카자흐스탄의 정치는 다양한 양태를 보이고 있다.
에너지 부문과 더불어 카자흐스탄 자본가 계급의 주요 활동 영역은 바로 금융 부문이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초반 체제전환의 혼란한 시기에 지방의 씨족에 기반을 둔 일부 지배 집단들은 주요 사유화 기금들의 관리자들이었고, 그 후의 시기에는 금융 부문을 중심으로 생겨난 새로운 자본가 계급, 즉 올리가르히로 진화한 바 있었다(Dave, 2007). 그런데 1993년 1,023개 이상으로 난립하던 은행들은 2001년에 48개 정도로 정리가 되었지만, 점차 국가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 최대 은행이었던 BTA은행과 유망 은행이었던 알리안스은행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삼룩-카지나가 지분을 갖는 형태로 국유화되었고, BCC은행은 외국 은행으로 매각되는 등 민간 주도의 금융 부문의 위축이 강화되어 왔다. 또한 할릭은행의 경우 사실상 쿨리바예프 부부가 소유한 은행으로 엄격히 말해 건전한 민간 금융이라고 보기 어렵게 되었다(Ageev et al., 2008).
이들 외에도 카자흐외환은행, 카자흐산업은행, 테미르은행, 카스피은행, 누르은행 등 규모가 조금 더 작은 은행들이 많이 있는데, 이들 중 테미르은행과 카스피은행은 삼룩-카지나 기금에게 지분의 절반을 허용하면서 사실상 국유화되는 등 구조조정이 강제되었다. 누르은행의 경우에도 대통령의 장녀 다리가의 소유권이 인정되는 등 사실상 국가의 강력한 통제 하에 있는 은행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금융기업들은 카자흐스탄 상위 50대 기업들 중 상당수가 최상위권에 위치해 있는 등 단순한 금융기업들이 아니다.
한편 앞에서 보았듯이, 국가 최대 전략 산업인 석유 부문은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에 이르는 기간 대부분 다시 국가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지만, 다른 채굴 산업들은 여전히 사적인 자본가들의 수중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2008년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금융 부문의 자율성이 크게 축소되었고 대부분의 거대 은행들은 공공 기금의 요구에 응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제 채굴 산업 부문 역시 국가 통제력이 강화되는 상황이 되었다.
예전부터 올리가르히들은 정책을 결정하는 집단들, 그 중에서도 대통령 일가친척들과의 관계를 긴밀하게 유지해 왔다. 이들 올리가르히들은 이러한 정부 고위급 인사들의 후원없이는 제대로 된 기능을 행사할 수 없었지만, 동시에 이들은 대통령 일가들의 경제적 야망이 자신들과의 협력과 경쟁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하는 특별한 전략 하에서 움직여 왔다. 그러나 이들 두 집단 간의 긴장 관계는 2002년에서 2005년의 기간 동안에 벌어졌던 나자르바예프의 경제의 재중앙집중화 정책과 2008년 글로벌 경제 위기에 이은 카자흐스탄 경제 위기를 거치며 크게 붕괴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대통령 일가의 멤버로 비非 카자흐 민족 대 자본가들이 지배 엘리트 내 한 축을 이루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즉 석유와 가스 등 일부 전략 산업 분야에서는 올리가르히들 중 카자흐인들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여 국가의 부를 나누고 있지만, 대통령 일가의 후원 하에 그들의 멤버가 된 일부 올리가르히들은 비 카자흐 민족 출신들로서 이는 나자르바예프 일가에 의한 의도적인 조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중 유명한 올리가르히는 고려인인 블라디미르 김(Vladimir Kim), 키르기즈스탄 출신의 위구르인인 아딜잔 이브라기모프(Adilzhan Ibragimov), 유대계 러시아인인 알렉산드르 마쉬케비치(Aleksandr Mashkevich), 그리고 우즈벡인 파토흐 초디예프(Patokh Chodiyev) 등이 있다.
이들 거대 올리가르히 집단 외에도 일부 올리가르히들은 고위행정관료의 지위를 얻기도 했다. 1990년대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소비에트 세대를 대표하는 기술 관료들은 2000년대 중반까지도 그 역할이 막대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세대 기술 관료들의 특징은 러시아와 관련된 지위에 있거나 대통령 행정실, 그리고 아스타나와 알마티 두 수도의 주지사 등 중앙과 지방 행정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1]
최근 점차 소비에트적 배경과 경험이 없는 새로운 기술관료 세대들이 이들을 대체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중요한데, 특히 서구권에서 유학을 하고 귀국하는 젊은 집단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가의 대대적 지원 프로그램인 볼라샥으로 해외에서의 유학한 학생들의 귀국은 민주주의와 공정한 시장 경제를 요구하는 반 나자르바예프 세력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어서 폐지되었지만, 부유층을 중심으로 2세들의 해외에서의 유학이 증가하면서 이러한 집단들은 향후 중요한 변화를 야기하는 집단으로 성장할 가능성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세력 균형 구도의 형성은 바로 나자르바예프 대통령 자신이 직접 구축한 것이라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나자르바예프는 이러한 새로운 세대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옛 수하들로 하여금 언제든지 교체가 가능할 만큼 자신에게 아직도 권력이 건재함을 과시하면서 충성 경쟁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자유주의적 성향이 강한 젊은 세대들로의 점진적인 엘리트 교체는 후견 시스템의 재조정을 필연적으로 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옛 세대와 마찬가지로 젊은 기술 관료들 역시 정치적 권력과 사적 이익의 확보를 위해서는 일정 정도 카자흐스탄 사회로부터의 요구를 반영하여 변화를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불필요한 엘리트 내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고 할 것으로 판단된다.
분명 카자흐스탄에서도 자본가 계급은 이미 1990년대에 체제전환 정책의 결과 자연스럽게 형성되었고 발전되어 온 것은 사실이나, 이들의 독자적 계급으로서의 자율성은 크게 제약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오히려 이들은 정치와 경제 양 영역에서의 권력을 적극적으로 향유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나자르바예프 일가와 종속적인 협력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카자흐스탄에서는 정치와 경제, 관료 영역을 넘나들며 지배를 관철하는 독특한 경제적 지배계급을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체제 공고화되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세대를 중심으로 자본가 계급의 자율성은 점차로 확대될 것이지만, 국가 권력의 변화가 없는 한 정경유착과 그로 인한 국가 자산의 독점 및 부의 공정한 분배, 민주주의 문제 등에 대한 논란은 계속될 것이다.
정재원(moscow4@kookmin.ac.kr)은
국민대학교 유라시아학과 교수이다.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사회학연구소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유라시아학과 주임교수로 활동 중이다. 그는 “러시아 혁명의 현재적 의의,” 진보평론 73호, 2017, 132-168, “러시아 극동 지방으로의 중국인 이주: 역사와 현황,” 러시아연구, 27권 1호, 2017, 355-393, “러시아식 자유주의의 한계: 트럼프 등장 이후의 러시아 대외정책,” Jpi정책포럼, 194권, 2017, 1-20 등 다수의 저서 및 논문을 출판하였다.
[1]1990년대 이후 대체로 고위 관료집단은 두 집단으로 나뉘어 경쟁 구도를 만들었다. 그 중 하나는 불라트 우스테무라토프(Bulat Ustemuratov) 파이고 다른 하나는 누르타이 아비카예프(Nurtay Abykayev) 파이다. 이 두 집단 간의 경쟁은 광산업을 둘러싸고 발생했다. 우스테무라토프는 마쉬케비치, 블라디미르 김의 카자흐미스 등과 이익이 충돌하고 있었다. 이 과정 속에서 우스테무라토프는 카자흐 정치 경제 내에 비 카자흐 민족 관료와 올리가르히들의 비중이 높아진 것에 대한 경각심을 고조시켜 카자흐 올리가르히들을 규합하면서 카자흐 민족주의를 선동하기도 했다. 상당부분의 기업들을 인수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아블랴조프와 수브한베르딘 등도 끌어들였다. 그러나 아비카예프는 반대로 러시아 네트워크들과의 관계를 강화함과 동시에 마쉬케비치와 블라디미르 김을 지지함으로써 그와 대립했다. 그러나 이 둘 모두 소비에트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많은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S. Peyrous, p. 366)
참고문헌
*본 기고문은 전문가 개인의 의견으로,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와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