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는 아제르바이잔 가발라 지역의 살비르 왕성과 러시아 연방 투바 공화국 아르잔 지역의 아르잔 고분군의 발굴 조사 성과를 소개하고자 하고 이를 통해 중앙 유라시아 고대 문명과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 교류의 실체의 일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중앙 유라시아 고대 문명의 실체와 동서 문화교류를 통한 중앙 유라시아 지역과 한반도의 긴밀한 관계를 추적하고자 하며, 통일 이후 예상되는 중앙유라시아와 한반도를 잇는 신실크로드의 구축에 필요한 인문학적 정보를 제공하며 향후 진행될 도로와 철도와 같은 다양한 건설 작업에 앞서 진행될 문화재 조사의 기초정보를 축적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쌓을 수 있는 해당국가와의 문화적 우호관계가 장차 경제적 협력관계로까지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다.
김종일 (서울대학교)
최근 세계 각국에서는 고대 시기 동서 교류의 주된 통로였던 실크로드에 대한 관심이 폭증하고 있다. 이러한 관심은 전 세계가 세계화의 흐름과 함께 각 지역들 사이에 활발한 경제교류를 강조하는 분위기 속에서 등장했다고 할 수 있다. 동과 서의 여러 정치체들이 고대 교역로인 실크로드를 따라 활발히 교류를 하였고 이러한 교류가 동과 서의 문명 형성 및 쇠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중앙유라시아를 거쳐 동과 서의 경제적 교류와 협력을 추진하고자 하는 여러 나라에게 중요한 역사적 정당성과 명분을 제공하고 있다. 아마도 중국의 실크로드 세계문화유산 등재와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이 이러한 경제적 관점과 함께 역사적 사실을 강조하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고대 실크로드의 동단에 위치하고 있는 한국에서도 이러한 교류와 관심을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중앙유라시아 지역을 비교적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된 이래 정부적 차원에서 각종 외교적.경제적 협력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였고 각 지방 자치단체에서도 이 지역과의 각종 협력관계와 더불어 실크로드와 관련한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에 따라 종래 막연히 알고 있던 중앙유라시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많은 정보를 축적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중앙유라시아와 실크로드는 1980년에 제작된 일본 NHK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실크로드」와 기타로(喜多郎)의 주제음악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접할 수밖에 없었던 머나먼 ‘미지의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직접 접하고 교류하는 이웃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경주의 신라 적석목관분에서 발견되는 각종 유리그릇과 황금보검 그리고 서역인으로 추정되는 석인상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한반도의 고대국가들이 중앙유라시아 지역의 여러 정치체와 활발한 문화 교류를 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주며 한국의 관련 학계에서도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고대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교류와 관련한 여러 주제에 대해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주목할 만한 학문적 성과를 쌓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점에서 지금까지의 연구에 별 문제는 없었는지 그리고 향후 연구에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을 없는지 꼼꼼히 생각해보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국내 중앙유라시아 연구의 현황과 문제점: 고고학 발굴조사를 중심으로
국내 중앙유라시아 연구는 비단 고고학이나 미술사 분야뿐만 아니라 역사학이나 언어학, 민속학, 인류학, 지리학, 음악학 등 여러 분야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주로 고고학 발굴조사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 이유로는 실크로드를 통한 문화 교류의 흔적을 물질자료를 통해 가시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사례인 동시에 주는 장기간에 걸쳐 국립박물관과 국립문화재연구소를 포함하는 국립 기관과 대학을 포함한 여러 민간 기관 등에서 지속적으로 조사를 진행해 왔기 때문에 국내 중앙유라시아 연구가 갖고 있는 성과와 한계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고대 실크로드는 고대 시기 이래 대상들이 여러 도시를 오가며 무역을 하던 일종의 교역로로 인식되어왔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의 고대 실크로드는 사실상 중국의 한대 이후 한 제국의 성립과 함께 기존의 여러 교역로들 가운데 중앙유라시아의 여러 나라들이 한나라와 외교 혹은 교역을 하기 위해 사용했던 가장 대표적인 교역로라고 할 수 있다. 즉 우리가 흔히 아는 실크로드는 사실상 한대 이전에 성립되었던 여러 교역로 가운데 하나이며 그러한 교역로는 원래 중앙유라시아의 여러 정치체와 도시 사이에 일종의 그물망으로 존재했던 일종의 네트워크였다고 할 수 있다. 즉, 중앙유라시아의 여러 도시와 정치체 사이에 존재했던 교역망 가운데 일부가 한대 이후 중국과의 외교와 교역을 위한 일종의 교역로, 즉 고대 실크로드로 등장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중앙유라시아 실크로드에 대한 연구가 단지 중국 혹은 한반도를 연결하는 대표적인 몇 개의 교역로에 주목하는 대신 고대 시기 이전, 즉 선사 시대 이래 존재해 온 교역 네트워크의 집합체로서 실크로드의 형성과 그러한 실크로드의 시기에 따른 변화에 대해 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한편 장기사적 관점에서 그리고 유목 문화와 농경문화의 형성과 교류의 측면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이러한 실크로드는 동과 서의 교역로의 역할뿐만 아니라 유목 사회와 농경 사회와의 교역과 교류가 행해졌던 장소이며, 실크로드를 통해 유목 사회와 농경 사회 사이에 상업적 목적의 (재화의) 교환이나 거래 외에 정치·외교적 목적의 조공 혹은 사여 등의 행위가 있었으며, 심지어 인간의 이주나 문화 접변이 빈번하게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장기사적 관점의 연구는 실크로드의 역사를 정치체 혹은 문명권 사이의 교류를 포함하여 다양한 생태적 환경 사이의 교류의 역사로 봄으로써, 그리고 그러한 생태적 환경의 형성과 변화가 실크로드의 형성에 끼친 영향에 주목하여 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실크로드의 역사를 바라보고자 한다. 결국 기존의 연구가 주로 동서 교류에 연구의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제는 중앙유라시아에 존재했던 다양한 교역 네트워크로서, 농경 사회와 유목 사회의 다양한 문화 교류와 문화 접변, 그리고 이주를 가능케 했던 실크로드의 역할에 대해 주목을 해야 하는 시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또 하나 강조하고 싶은 사항은 지금까지의 실크로드에 대한 국내의 관심이 주로 한반도와 중앙유라시아와의 긴밀한 관계만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신라 경주에서 발견되는 유리그릇과 황금 보검의 기원지를 추적하고 이러한 유물들이 한반도로 전래되는 교역로를 추정하며 이를 통해 한반도와 중앙유라시아와의 긴밀한 교류 관계를 강조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방식의 연구가 나름대로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러한 관점에서만 실크로드를 바라볼 경우, 자칫 실크로드가 갖고 있는 원래의 역할과 의의를 파악하는데 어려울 수 있다. 따라서 실크로드를 동과 서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시각이 아닌 중앙유라시아 자체의 관점과 맥락에서 해석해 볼 필요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중앙유라시아 자체의 맥락에서 실크로드의 역할과 실크로드 상에서 일어났던 다양한 문화 교류와 접변 현상을 파악하기 위해 최근 20여 년 간 한국의 여러 연구기관이 발굴조사에 참여한 바 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문화재연구소 그리고 동북아역사재단과 같은 국립 기관과 발굴 법인을 비롯한 민간 기관들, 그리고 대학 등의 기관들이 러시아와 몽골을 포함한 중앙유라시아 지역에 위치한 총 58개의 유적 조사에 참여한 바 있으며 향후 이러한 조사 지역과 대상은 점차 확대될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이러한 발굴조사 대상지역이 러시아, 특히 연해주와 몽골에 지나치게 편중되고 있다는 점도 지적되어야 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제대로 주목을 받지 않고 있던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발해 유적과 오랜 우호적 외교관계와 함께 공동 유적 조사의 역사가 깊은 몽골을 제외한 여타 지역에는 상대적으로 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조사대상지역의 편중은 향후 조사에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문제라고 판단된다.
이와 관련하여 지난 10년 동안 필자를 포함한 유라시아 고고학 연구팀에서는 크게 세 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첫째, 기원 전후한 시기 중앙유라시아 지역에서 관찰되는 고대 정치체의 형성과 도시화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 코카사스 산맥 남쪽과 카스피 해 사이에 위치한 아제르바이잔 가발라 지역의 살비르(Salbir) 왕성 유적을 발굴조사하고 있으며, 둘째, 기원전 8-7세기에 흑해 연안에서 알타이 산맥에 이르기까지 여려 측면에서 상당히 특징적인 유목 문화를 형성했던 스키타이의 왕묘를 발굴하여 이 당시에 존재했던 유라시아 유목 문화의 실체를 밝히고자 러시아 연방 투바 공화국의 아르잔 고분군 칭게타이(Arzhan Kurgan Chingtei) 1호묘 조사에 참여하고 있다. 또한 청동기 시대 이래 흑해 연안과 러시안 스텝 지역에서 몽골 지역에 이르는 광대한 중앙유라시아지역에 존재하는 쿠르간(봉분이 있는 무덤)의 분포와 부장품을 데이터베이스화하고 이를 지형정보시스템과 연동하여 공간정보화 하고자 시도하고 있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008년 사전 답사를 거쳐 2009년부터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시작된 아제르바이잔 가발라 지역 살비르 유적은 코카사스 남부 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형성된 코카시안 알바니아의 도성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고고학 발굴조사는 일차적으로 이 도성 유적이 고대 시기(기원전 4세기 이후)에 형성되었다는 점을 확인하고 고대 시기 이후 중세에 이르는 시기까지 도시 구조의 특징을 밝히며 이 도성 유적이 동서교류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을 주된 목표로 설정하였다. 이러한 구체적 목표 아래 조사팀은 지난 10년간의 발굴조사를 통해 매우 중요한 발굴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북성벽을 절개하여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이를 통해 북성벽의 최초 축조 시점이 기원전 1세기 이전으로 소급될 수 있으며 이후 중세시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증축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축성 방법이 사용되었음을 발견하였는데 특히 대형의 점토 블록을 사용하는 등 사산조 페르시아의 축성기법이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서성벽 부근의 고지대 지점 발굴조사를 통해 고대시기에 해당하는 건축물의 바닥 흔적과 각종 저장용 구덩이를 발견하였으며 중세 시기의 가옥과 오븐이나 토기 요지 그리고 우물이나 카낫(qanat)으로 불리는 지하수로 등 도시화의 증거를 발견하였다. 또한 기원 전후한 시기로 편년되는 지하실 횡혈묘, 즉 카타쿰 무덤 십 수여 기가 발견됨으로써 이 도성 유적의 축조 및 사용시점 그리고 중세시기에 이르기까지의 도시화의 과정을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지하실 횡혈묘에서는 각종 고대 시기의 엔틱 토기와 함께 사르마티아의 영향을 받은 철제 무기 (철제 화살촉, 이지창(二枝槍), 갑옷 및 마구류 등)과 파르티아의 코인 등이 발견된 바 있으며, 특히 이스탄불이나 키프로스, 그리고 서유럽 등지에서 발견된 것과 똑같은 형태의 유리그릇이 발견된 바 있다. 인골 역시 여러 개체가 발견된 바 있는데 주목할 만한 점은 유리그릇과 각종 철제 무기가 함께 발견된 8호 카타쿰 무덤에서 발견된 인골이 여성의 인골이라는 점과 13호 무덤에서 발견된 여성 인골에서 두개골을 특정한 형태로 변형시키는 편두(褊頭)의 흔적이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사르마티아에서 화살과 단검으로 무장한 여성 전사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 있으며 코카사스 지역의 소수 민족인 알란(Alan) 족 사이에 편두의 풍습이 있었다는 사실 역시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아제르바이잔 가발라 살비르 유적 발굴조사를 통해 코카시안 알바니아라고 알려진 고대 정치체가 고대 시기(기원전 4세기 경)부터 등장하여 성채 및 도시화 과정을 통해 성장하고 있었으며 로마의 유리그릇과 사르마티아의 무기류, 파르티아의 코인, 그리고 사산조 파르티아의 축성방식에서 알 수 있듯이 주변 지역의 다양한 문화적 요소들이 무덤의 축조와 축성 과정에서 서로 융합되는 일종의 문화의 교계지(交界地) 역할을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인골에 나타난 여러 증거를 통해 당시 이 지역의 젠더적 특징과 매장 풍습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북성벽과 서성벽 인근 발굴조사 지역은 여러 차례의 유적 보존처리와 보호시설을 세워 야외전시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 야외전시장은 지역 주민들뿐만 아니라 가발라 지역을 찾는 다수의 관광객들이 찾는 훌륭한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향후 최소 5년간의 추가 발굴 조사를 거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필자를 포함한 한국 유라시아 고고학 연구팀은 2018년 올해 여름부터 러시아 연방 투바공화국 아르잔 고분군 칭게타이 1호분 발굴조사를 러시아 에르미타주 박물관과 공동으로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 무덤군은 대략 20km의 협곡에 180여 기의 쿠르간이 일렬 혹은 이렬로 분포하고 있다. 이 가운데 아르잔 1호분은 지난 1970년대 구소련 발굴조사단에 의해 조사되어 스키타이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훌륭한 고고학 사례로서 전 세계 고고학계에 많은 충격을 준 바 있다. 1990년대 초반 러시아 에르미타주 박물관과 독일 고고학 연구소에 의해 진행된 아르잔 2호분발굴조사를 통해 역시 수만 여 점 이상의 황금 유물과 말 순장 등이 발견되어 스키타이 지배층의 매장 풍습과 관련한 엄청난 정보를 제공한 바 있다. 특히 아르잔 고분 1호 및 2호의 발굴조사 성과는 지금까지 부정확하거나 근거가 없는 것으로 여겨진 스키타이 매장풍습에 대한 헤로도투스의 서술이 나름대로 근거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헤로도투스는 그의 저서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왕이 죽으면 그곳 땅에 큰 사각형 구덩이를 판다. 구덩이가 완성되면 전신에 밀랍을 바른 시신을 수레에 싣는다. 그 전에 시신의 배를 절개하고 깨끗이 청소한 다음 으깬 생강, 향료,파슬리 씨, 아니스를 넣고 다시 봉합한다. 그런 상태로 시신을 수레에 싣고 다른 부족들에게 간다. 시신이 도착하면 그곳에 사는 부족은 시신을 받아들이며 왕령 스퀴타이 족이 했던 것과 같은 짓을 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귀를 일부 자르고, 삭발하고, 팔에 둥글게 칼자국을 내고,이마와 코에 칼금을 내고,화살로 왼손을 꿰뚫는다.
(중략) 그들의 지배를 받는 부족들 가운데 가장 멀리 사는 게르로스인들의 나라에 있는 장지에 도착한다. 시신을 그 곳 무덤 안 침상에 안치하고 나서 시신의 오른쪽 땅에 창들을 꽂고, 그 위에 나무 널빤지들을 걸치고갈대를 엮어 만든 지붕을 인다. 무덤 안에는 아직도 빈 공간이 있는데 , 거기에는 왕의 후궁 중 한 명, 술 따르는 자, 요리사, 마부, 집사 사자 한 명씩을 교살하여 순장한다. 그리고 그의 말 몇 필과 재물 일부와 황금 잔 몇 개도 함께 묻는다. 스퀴타이 족은 그런 일에는 은과 청동을 쓰지 않는다.
그리고 거대한 봉분을 짓기 시작하는데, 되도록 봉분을 크게 지으려고 서로 열심히 경쟁한다. 일년 뒤 그들은 또 다음과 같이 한다. 아직도 살아 있는 왕의 시종 가운데 이들은 모두 토박이 스퀴타이 족이다. 왕이 부르는 자는 누구나 왕의 시종이 되는 것이며 왕이 돈을 주고 노예를 사는 일은 없다. 가장 훌륭한 자들 50명과 왕의 준마 50필을 목 졸라 죽인다. 그들은 말들의 내장을 제거하고 깨끗이 씻은 다음 왕겨를 채워 넣고 다시 봉합한다. (중략) 말들의 목속에 목 있는 데까지 막대기를 길게 박아 넣은 다음, (중략) 그들은 교살된 50명의 젊은이들을 각각 말 등에 앉히는데, 이때 젊은이들의 척추를 따라 목 있는데 까지 곧은말뚝을 박아 넣는다. (중략) 그리고 그들은 이들 기수들을 무덤 주위에 빙 둘러 세운 다음 그곳을 떠난다. 그들은 왕을 그렇게 매장한다.[1]
헤로도투스가 이와 같이 묘사한 스키타이 왕들의 매장 풍습은 스키타이의 원 거주지로 알려진 흑해 연안의 스키타이 무덤에서는 확실하게 확인된 바 없는 까닭에 아마도 과장되거나 잘못 전해진 전승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아르잔 1호분과 2호분이 발굴·조사됨으로써 헤로도투스의 기록은 유라시아 동부지역에 거주했던 스키타이의 매장 풍습이 구전 등을 통해서 헤로도투스에게 알려졌고 이후 이를 기록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아르잔 1호분과 2호분의 연대가 흑해 연안의 스키타이 무덤들보다 이른 시기에 편년될 수 있음이 밝혀지면서 동부 스키타이 문화가 흑해 연안의 스키타이 문화보다 시기적으로 이른 시기에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한국 조사단이 참여하고 있는 칭게타이 1호분은 아르잔 1호분과 2호분의 정반대편 끝에 위치해 있으며 아르잔 2호분과 대략 규모나 시기가 비슷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는 주로 매장 주체부 주변의 배장묘를 중심으로 발굴조사가 진행되었으며 2019년부터 매장주체부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 질 계획이다. 따라서 내년 이후에 유라시아 동부지역 스키타이 왕묘의 실체와 함께 기원전 8-7세기 이후 스카타이 문화의 확산을 통한 중앙유라시아의 문화교류에 대해 보다 많은 정보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청동기 시대 이래 중앙유라시아 지역에 등장했던 대부분의 정치체들이 갖고 있는 여러 공통의 문화적 요소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는 쿠르간, 즉 봉분이 있는 무덤을 들 수있다. 즉 쿠르간으로 대표되는 매장 풍습은 중앙유라시아 유목사회와 농경사회의 공통적인 문화 요소이며 따라서 쿠르간의 분포와 축조 방식, 그리고 부장품의 비교 검토를 통해 중앙유라시아 사회의 문화 교류와 문화 접변의 과정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청동기 시대 이래 흑해 연안에서 몽골과 신장 지역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에 위치한 대표적인 쿠르간에 관한 광범위한 정보를 수집하여 이를 데이터베이스화하고 다시 지리정보체계와 연동하여 다양한 공간통계분석을시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바 있다. 일차적으로 쿠르간과 관련한 각종 문헌정보를 수집하여 이를 목록화하고 문헌에 제시된 쿠르간들의 개별 속성들을 봉분의 형태와 크기 내부구조와 같은 쿠르간 자체의 형태적 특징과 부장품의 종류와 같은 여러 범주들로 구분하여 이를 데이터베이스화하였다. 이 데이터베이스를 쿠르간의 위치정보와 함께 지리정보체계와 연동하여 핫스팟분석이나 공간적 자기상관관계와 같은 각종 공간 통계 분석에 사용될 수 있는 구조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중앙유라시아 쿠르간 데이터베이스는 비록 조사가 되지 않거나 관련 정보를 획득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많은 부분에서 보완할 점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쿠르간과 관련한 각종 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각종 공간 분석을 위한 기본적인 분석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매우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향후 지속적인 보완을 거쳐 보다 완성된 형태의 쿠르간 데이터베이스체계를 구축해 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중앙유라시아 쿠르간과 실크로드에 관한 연구는 일차적으로 이 지역에서 쿠르간을 바탕으로 한 일종의 교역과 이동 네트워크가 구축되는 과정에 대한 연구를 진행할 필요가 있으며 이 과정에서 고대 한국의 고분 문화가 유라시아 쿠르간 문화의 전체적 맥락에서 가질 수 있는 역할과 의의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위해서는 쿠르간에 대한 고고학 발굴조사뿐만이 아니라 이러한 쿠르간이 축조되는 중앙유라시아 지역의 역사와 문화, 지리 등에 관한 기초적인 연구 작업이 필요하며 따라서 장기적인 연구계획의 수립과 함께 고고학, 언어학, 인류학, 지리학과 같은 여러 분야를 포함하는 다학제간 연구 조직이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ODA 사업과 같은 국가적 지원과 국제적인 연구 네트워크의 구축 역시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은 단순히 학술적 영역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통일 이후 예상되는 중앙유라시아와 한반도를 잇는 신실크로드의 구축에 필요한 인문학적 정보를 제공하고 이 과정에서 진행될 각종 협력사업과 건설 작업과 관련한 기초 정보를 축적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쌓을 수 있는 해당 국가와의 문화적 우호관계가 장차 경제적 협력관계로까지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는 점 역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김종일(jikim218@snu.ac.kr)은
서울대학교 교수이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고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조교수를 거쳐 2006년부터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고고학과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로 유럽 선사 시대 및 한국 청동기 시대의 개인의 정체성과 물질성, 경관과 관련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지난 10여년 간 아제르바이잔과 러시아 투바 공화국 등지에서 해외발굴조사에 주력하고 있다.
[1]천병희역, 헤로도투스 『역사』 4권 71-3의 내용중 일부 발췌
참고문헌
*본 기고문은 전문가 개인의 의견으로,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와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