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해체 직후 중앙아시아의 다른 국가와 마찬가지로, 독립국가의 형태로 국제사회에 깃발을 올린 투르크메니스탄은 ‘천연가스의 부국’이라는 고정적 이미지 외에는 국제사회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초대 대통령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는 미지의 인물이었고, 당시 국가경제는 전반적으로 후진적인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하메도프 대통령의 투르크메니스탄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성장세를 지속 중이며, 대외적으로도 개혁•개방된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살펴보고 한국의 대응을 파악해 보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황영삼 (한국외국어대학교)
소련 시기에 투르크멘 공화국(투르크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1924-1991)[1]은 주로 천연가스와 면화의 생산지였고 제조업을 비롯한 주요 공업시설이 열악했다. 그래서 소련 해체 직후 모스크바의 지원이 중단되자 경제적 인프라가 낙후되었던 투르크메니스탄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다행히도 풍족한 천연가스를 러시아의 간섭 없이 독자적으로 생산, 공급할 수 있었다는 점이 국가를 발전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신생 투르크메니스탄 국가는 천연가스를 수출하여 얻은 외화를 토대로 국가경제의 발전을 꾀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현재는 폐기되었지만 니야조프 시기에는 일반 국민들에게 전기, 수도, 가스 및 소금 등이 무료로 공급되었고, 자동차 소지자에게는 월 200L의 급유 쿠폰이 제공되었다. 복지국가라 아니할 수 없었다.
초대 대통령 니야조프(Saparmurat Niyazov: 1940-2006) 시기에 투르크멘 일반 국민들의 복지는 한국과 같은 국가에서 볼 때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그것은 천연가스와 같은 지하자원에 대해 국가독점이 합법화되고 주요 산업의 국유화가 관례화되었던 이른바 ‘지대추구 국가(rentier state)’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국민경제에 대한 국가의 주도권은 이와 같이 최고의 경지에 있었고, 마치 소련식 사회주의를 연상하게끔 했다. 이러한 정도가 강한 국가주의 경향은 강력한 정치적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일로 연결되었다.
투르크메니스탄의 대통령 선출은 국민이 직접 뽑는 민주주의적 방식이 적용되었지만, 서구식 형태의 대립된 정당 간의 대결 구도 양상은 아니었다. 니야조프 시기에는 투르크메니스탄 민주당(과거 소비에트 공산당)이 유일한 정당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국제사회에서 투르크메니스탄은 비민주적 국가라고 비난받기도 했던 것이다. 대통령 선거 또한 99%에 가까운 득표율과 사전에 당선자를 예측하는 일이 가능한 시스템 하에서 선거란 일종의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니야조프 시기의 권력구조는 매우 특이한 양상을 보였다. 의회 위에 군림하여 ‘할크 마슬라하티(Halk Maslahati: 국민회의)’[2]라는 회의체가 헌법상 최고의 기구였고, 대통령, 국회의원, 주요 관료, 노동조합 지도자, 청년회 지도자, 원로 대표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최대 구성 인원은 2,508명에 달하기도 했다(Кадыров 2001, 295).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 형태를 표방한 것인데, 이러한 개념은 일단 소비에트 최고회의 조직과 유사하다. 그리고 유목민 집단의 특징인 부족회의 및 종족회의의 전통과도 연결되는 것으로서 주요 사안에 대해 주요 부족대표들이 모여 의사를 결정하던 방식과도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독재를 방지하는 민주적 의사결정 방식이었다(황영삼 2017b, 116-117).
1995년에 투르크메니스탄이 UN에서 영세중립국으로 승인받은 일은 국가의 독자적 외교노선을 강화하는데 기여했다. 당시 UN 총회에서 미국, 러시아, 이란, 파키스탄, 터키 및 기타 인접국가들을 포함하여 총 18개국의 요청으로 투르크메니스탄 영세 중립화안이 UN 의제로 채택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1995년 12월 12일에 185개국의 만장일치로 UN 총회에서 투르크메니스탄의 영세중립이 승인되었다.[3]
일단 영세중립을 확보한 투르크메니스탄은 인접한 타지키스탄이나 아프가니스탄 등 내전의 혼동 속에 있던 국가와는 달리 군사비 확보에 대한 부담은 훨씬 낮은 상태를 가지게 되었다. 국가의 인적, 물적 자원을 경제성장과 사회복지에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은 중앙아시아에서 강한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국내정치의 본질을 살펴보면, 니야조프 시기에 특히 민주주의 제도와 역행하는 조치가 빈번히 이루어지게 되면서 국민의 기본적 권리가 침해되는 부작용이 발생했다. 가령 학생들의 외국유학이 금지 혹은 제한되거나, 발레와 오페라 공연의 폐지, 외국학위의 불인정(터키 학위는 유일하게 예외), 일종의 정신적 교훈서인 <루흐나마(Ruhnama: 영혼의 서)>[4]의 강요 등이 그것이다. 그 결과 니야조프 시기의 정치체제는 보편적 국제사회의 가치관으로 볼 때 독재에 해당했던 것이다. 당연히 한국과의 교류 또한 상상할 수도 없던 시기였다.
니야조프 대통령은 2006년 12월에 갑자기 사망했다. 당시 우크라이나, 조지아, 키르기즈스탄 등에서 있었던 이른바 급진적 정치 변동이 투르크메니스탄에서도 발생할 것인지에 대해 국제사회가 초미의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이듬해 2월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무명의 인물에 가까웠던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하메도프(Gurbanguli Berdimuhamedov: 1957- ) 전직 보건부 장관 겸 부총리가 대통령으로 당선됨으로써 ‘조용한’ 권력승계가 이루어졌다(황영삼 2009, 76). 사실 베르디무하메도프는 니야조프 대통령의 주치의를 겸하고 있기도 해서 두 사람의 관계가 매우 밀접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전문가를 비롯한 국제사회에서는 베르디무하메도프 시기의 투르크메니스탄의 변화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여 주었다. 대통령은 과거의 관행을 타파하거나 약화시키는 일에 주저하저 않았는데, 대표적으로 대외적 문호개방 정책이었다. 니야조프 체제가 폐쇄적 국수주의라고 한다면 확연히 대비되는 정책이었다. 학생들의 외국유학이 허용되고, 학위문제도 해결되고 발레와 오페라 공연히 허용되었다. 다만 ‘루흐나마’는 폐지보다는 완화 쪽으로 결정되었다. 입시과목에서 없어진다거나 과도한 독서를 요구하지 않는 선에서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외국투자의 유입을 적극 권장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추진되었다. 이때 현대 엔지니어링과 LG상사가 재빠르게 투자 타진을 감행했고, 그 결실은 이미 언론에서 보도되었던 바와 같이 키얀리 플랜트 프로젝트에서 나타났다. 투르크메니스탄에서 대규모 프로젝트는 통상 대통령의 재가가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사전에 대통령과의 면담은 필수적이다. 아마 한국의 두 대기업은 현재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이 인정할 정도로 인지도가 높은 상태에 있다.
베르디무하메도프 대통령의 개방적 외교정책은 그가 UN에서 연설하는 것을 꺼리지 아니하고 외국의 국빈을 초청하여 회담하는 등의 모습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즉 투르크메니스탄은 폐쇄된 국가가 아니라 국제사회에 개방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니야조프 시기에 냉각되었던 러시아와의 관계는 2009년에 있었던 가스 파이프라인 폭발 사고에도 불구하고 회복되었다고 판단되는데 그 중에 러시아어 교육기관인 푸쉬킨 스쿨이 활성화되었다. CIS 정상회담에서 푸틴과 베르디무하메도프의 회동 또한 러시아와의 관계정상화를 보여준 일이었다.
중국이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대해 들이는 관심과 투자는 이미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송유관이 카자흐스탄을 횡단하여 중국 내륙으로 건설되고 양국의 도로 연결이 진행되었으며 키르기스스탄을 관통하는 고속도로 성격의 도로 또한 건설되었다. 이러한 중국의 투자 확대는 투르크메니스탄까지 이어졌고 시진핑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일대일로 사업에서도 투르크메니스탄이 중요한 국가로 간주되었다.
투르크메니스탄은 중국, 러시아는 물론 서방국가, 제3세계 국가와도 차별없이 국가관계를 개선하고 있고 외국의 투자를 장려하고 있다. 심지어 인접한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과도 우호관계를 설정하고 특히 카자흐스탄과는 철도연결을 통한 물류 소통에도 노력하고 있다. 즉 카자흐스탄-투르크메니스탄-이란을 연결하는 철도가 부설되어 현재는 화물의 이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국제 여객노선은 없는 상태이지만 향후 점차적으로 실행할 계획은 있다. 만약 국제 여객철도가 실행된다면 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이란 노선이 연결되어 관광산업의 활성화가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투르크메니스탄 신임 대통령은 경제개발에 최고도의 주안점을 두고 있는데 우선 가스파이프라인의 다변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과거에는 주로 러시아를 통해 북상하는 루트가 유일한 공급노선이었던 반면, 니야조프를 비롯하여 현 대통령마저도 러시아 루트에 국한하지 않는 다방면 노선을 개발했던 것이다. 대표적으로 투르크메니스탄-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중국을 잇는 공급라인이 2009년에 개통함으로써 천연가스의 동방 진출이 가능하게 되었다. 중국이 사실상 많은 공을 들였던 것이 사실이었고, 이 과정에서 양국의 친밀도는 급상승하게 되었다. 투르크멘 학생들의 중국에 대한 관심도 타 국가에 비해 월등히 높은 정도인데, 그 이유는 베르디무하메도프 대통령이 강조하듯이 양 국민의 역사적 친근성이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천연가스 공급노선 다변화 정책의 상징인 투르크메니스탄의 새로운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타피(TAPI: Turkmenistan-Afganistan-Pakistan-India) 노선은 본래 니야조프시기에 이미 구상된 바 있었지만 2010년에 아쉬가바트에서 노선 설치계획이 공개적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상 실행되지 못하다가 현 대통령이 2017년 말에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투르크메니스탄의 마리 지역의 갈키니쉬 가스전에서 시작하는 파이프라인은 그 길이가 1,814km에 달한다. 실제 건설 시작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결국 실행된 것은 베르디무하메도프 대통령의 전방위적 외교정책과 함께 가스 파이프라인의 다변화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다만 정치적 혼란에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경우가 가장 큰 문제였지만 탈레반 세력도 가스관 건설에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2018년 말에 아프가니스탄 구간의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공사가 완공되어 투르크메니스탄 가스 수출량이 증가될 경우 국가수입의 증가 또한 수반되어 국가의 이익에 도움이 될 것이다.
아바자 관광단지 개발은 카스피해 연안의 도시 투르크멘바쉬 지역에 국제적 수준의 리조트를 건설함으로써, 국민들의 휴양지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한 장기적 전략에서 비롯되었다(황영삼 2015b, 90). 내년인 2020년에 최종적으로 완성될 계획이나 이미 현재에도 상당한 수준의 인프라가 구축되어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여기에 호텔은 물론, 요트장, 놀이시설, 국제회의장이 갖추어져 있다. 향후 카지노 시설까지 마련될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들까지 투르크메니스탄의 역사와 문화관광에 이어 휴양지로 선호하게 될 것이다. 수도인 아쉬가바트와의 교통연계가 불편한 것이 사실이나 이 부분 또한 고속도로 및 철도망 확충을 꾀하고 있다. 이전만 하더라도 외국인의 비자 취득에 애로사항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현재는 단체 여행자들의 비자는 거의 확실하게 발급된다. 다만 현재까지 관광객들은 투르크메니스탄 여행사에서 제공하는 패키지여행을 따라야 하는 것이 단점으로 꼽히고 있다.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이름난 리조트 단지 중에 키르기즈스탄의 이식쿨 호수 주변이 있는데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은 이를 능가하는 시설을 건설하겠다는 것이다. 해변 관광지 영역만 하더라도 길이가 15km에 달하는데 이는 해운대 백사장 길이의 10배 정도에 이른다. 남쪽 해안 지역에는 대통령 별장이 있어서 휴가철이면 어김없이 대통령이 그곳에 머문다. 당연히 일반인이 인근 지역으로 접근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투르크메니스탄 정부는 2017년에 국제 스포츠 경기인 아시아 실내무도 경기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스포츠 외교의 의지를 나타내었다. 투르크멘 당국은 2010년부터 국제 스포츠 경기 개최를 염두에 두고 아쉬가바트 남부 구역에 종합스포츠 단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5] 말하자면 잠실 올림픽 경기장 및 선수촌 아파트 건설과 유사하다. 최첨단 시설을 갖춘 경기장과 심지어 모노레일을 이용한 이동 수단 그리고 선수촌 아파트 등으로 이루어진 시설은 마침내 2017년에 제5회 아시아 실내무도 경기를 개최함(9.17-27)으로써 빛을 보았다.
2017년 대회 역시 국내의 언론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투르크메니스탄 국내에서는 마치 한국이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을 하듯 빅 이슈로 간주되었다. 아마 이때 투르크메니스탄을 방문했던 한국의 선수 및 스탭진들은 처음 방문한 투르크메니스탄을 보고 경이로운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흰 대리석으로 건설된 아쉬가바트의 풍광과 깨끗한 거리 및 쾌적한 도시 모습에서 감탄사를 연발했을 것으로 보인다. 인근의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른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투르크메니스탄 당국은 국제스포츠 경기 개최에 열광적인데 궁극적으로는 아시안 게임과 같은 전체 아시아 국가들이 참가하는 대회와 그리고 하계 올림픽 대회를 개최하는 것을 장기 목표로 한다. 이러한 정책을 추진하는 이유는 투르크메니스탄이 폐쇄적이고 국수적인 국가가 아니라 개방적이고 인류 보편적 이상을 가진 정상적인 국가임을 과시하는 면이 강하다.
2008년에 아쉬가바트에 대한민국 대사관이 설치되고 2009년에 아자디 외국어대학교에 한국어과가 개설되기 전까지 한국은 투르크메니스탄과 이렇다 할 교류를 갖지 못했다. 그 이유는 앞서 설명한 대로 투르크메니스탄의 국내정치적 상황과 우리의 낮은 관심도에서 설명된다. 한국 관광객의 투르크메니스탄 방문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대개 그때까지 중앙아시아 지역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 정도에 불과했고 굳이 인접한 투르크메니스탄까지 확대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투르크메니스탄 측에서도 동일하여 양국의 교류는 그저 형식적 차원에 머물렀다.
그러나 LG상사와 현대엔지니어링은 일찍이 투르크메니스탄의 성장 잠재력을 인식하고 경제적 진출을 모색했다. 그 결과 2009년 갈키니쉬(욜로탄) 정유공장 탈황장비 건설 사업을 수주받아 300여 명의 한국 노동자들을 파견했는데 이때는 중국 업체의 하청기관의 역할이었다. 2010년 당시 투르크메니스탄의 TV 속에서 한국 노동자들이 인터뷰하던 광경은 인상적이었다. 이와 같이 한국의 업체가 투르크메니스탄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당시 한국의 언론에 대서 특필된 사실은 별로 기억에 없다. 2008년 12월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 베르디무하메도프의 한국 국빈 방문 때도 국내 언론에 잠깐 소개될 정도에 불과했다.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의 방한 때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이러한 저조한 관심 속에서도 앞의 두 대기업의 투자 확대는 마침내 키얀리 가스화학 공장의 건설(2014-11 ~ 2018-09)이라는 당대 최고의 수주로 국내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4년간의 공정으로 건설될 키얀리 프로젝트는 34억 달러(3조 4천억원 정도)에 달하는 것으로서 해외건설 수주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당시 한국의 상황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동 프로젝트는 키얀리 지역의 정유공장을 현대화하고 동시에 폴리프로필렌과 폴리에틸렌 등 석유화학제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사업이었다. 여기에는 현대 엔지니어링, LG 상사 및 일본의 도요 엔지니어링(Toyo Engineering Corporation)이 컨소시엄을 형성하여 사업을 맡았다. 사실 국내언론에서는 일본 토요 기업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투르크메니스탄 언론에서는 충분히 언급되었고, 동 프로젝트의 계약 또한 베르디무하메도프의 일본 방문에서 체결될 만큼 일본의 비중은 적지 않았다.
투르크메니스탄 국영가스공사(Turkmengas)가 발주한 대형 프로젝트에서 현대 엔지니어링과 LG 상사는 70%의 지분을 가지고, 특히 LG 상사와 투르크멘가스는 합작회사를 설립하여 공장 완공 후 연간 7억 달러 규모의 폴리에틸린 판매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현대 엔지니어링은 2014년에 완공한 갈키니쉬 탈황시설 공장 건설을 비롯하여 투르크멘바쉬의 정유공장(2015년), 가스처리공장(2016년)에 이어 키얀리 프로젝트마저도 수행함으로써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으로부터 한국기업의 대표주자로 인정받았다.
이번 문재인 대통령의 투르크메니스탄 국빈 방문으로 경제적 측면에서 양국의 협력은 한층 더 높아질 것이다. 아쉬가바트에서 보이는 현대차 버스는 2017년 아시안 실내무도 경기를 즈음하여 한국에서 제공한 것이고 이어서 400대가 더 지원되면 900대에 이르는 한국차가 선보일 것이다. 가스공장 프로젝트 외에도 이번에는 섬유산업에 대한 프로젝트도 강구되었다. 이를 포함하여 현재 진행 중인 투르크메니스탄의 사업 프로젝트에 한국 기업이 참여할 기회가 높아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투르크메니스탄에서는 한국의 두 대기업이 선제적으로 활동한 결과 한국의 이미지를 신장시키는 한편, 투르크멘 일반 사람들로부터 극동의 국가 한국에 대한 관심도를 증대시켰다. 2013년에 주한 투르크메니스탄 대사관이 서울에 설치되고 이듬해에 초대 대사가 부임하여 현재까지 재직하고 있는 것을 보면 투르크메니스탄 당국이 생각하고 있는 한국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이전까지는 베이징 주재 투르크메니스탄 대사가 겸직하고 있던 한국에 대해 직접적으로 관할한다는 것은 그만큼 대외관계에서 국가의 비중이 높아지고 인적 교류도 활발함을 의미한다. 아쉽게도 직항이 개설되고 있지 않은데 아직까지 인적 교류가 항공사의 이익을 줄 만큼 크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직항노선 개설은 원칙적으로 합의되어 있기 때문에 때가 되면 실행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로서는 터키를 경유하여 투르크메니스탄으로 입국하는 것이 가장 무난한 선택이지만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이 단점이다. 대체 방안으로 두바이, 베이징, 알마티, 모스크바 등을 경유하는 방법이 있지는 대개 그러한 노선들은 주 2회만 운영하고 있어서 비즈니스맨들이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지금까지 투르크메니스탄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주로 경제적 측면에서 고찰되었다. 문화교류도 사실 2008년부터 작은 규모이지만 정례적으로 꾸준히 진행되어 왔다. 한국의 공연예술단이 투르크메니스탄에서 공연하고 또 투르크메니스탄 공연단이 한국에서 공연한다. 아쉬가바트에서는 태권도 대회와 한국어 경연대회가 매년 개최된다. 매년 9월 첫 주에는 한국문화주간이 아쉬가바트에서 개최되는데 이를 통하여 한국의 문화를 투르크메니스탄에 전파하고 있다.
투르크메니스탄은 2018년 구매력 기준 1인당 GDP가 2만 달러를 넘겼다. 명목상의 1인당 GDP 또한 7,500 달러를 기록하여 중앙아시아에서 카자흐스탄에 이어 2위의 경제력을 가진 국가로 진단된다.[6] 베르디무하메도프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대외적으로 개방, 개혁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과거 소원했던 인접 국가와도 관계가 개선되고 극동의 한국과도 경제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영세중립국으로 공인된 안전보장은 국방비의 부담없이 경제성장을 구가할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되고, 풍부한 천연가스의 수출로 획득하는 외화는 국부를 증대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투르크메니스탄은 국제원유 가격의 변동에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국가에 속하기 때문에 원유가 하락 시기에는 경제적 타격을 받는 구조적 취약성이 있다. 이러한 사실은 국제적 저유가 시기였던 2014년부터 몇 년간 경험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래서 국민들에게 무상으로 공급되던 전기, 수도, 가스 사용료를 유상화하는 정책이 나왔던 것이다. 베르디무하메도프 대통령은 일찍이 섬유산업과 같은 제조업의 중요성을 인지하는 한편 관련 산업의 육성에도 노력을 하고 있다. 동시에 형식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세계적인 민주주의 추세를 수용하여 다당제를 도입했고, 문화의 다양성도 인정하는 정책이 실행되었다. 그렇지만 투르크메니스탄의 역사와 독립과정을 볼 때 나타나는 국민적 통합, 부족의 통합이라는 과제는 투르크메니스탄의 아킬레스건에 해당한다.[7] 이 과정에서 외국의 국내정치에 대한 관여에 대한 경계는 극도의 높은 수준에 달한다.
투르크메니스탄은 과연 믿을 만한 국가인가? 하는 물음이 생길 수 있다. 경제적 투자에 대한 보장은 어디까지이며 문화교류 또한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은 투르크메니스탄 국가에 대한 명확한 이해없이는 해소되지 않는다. 일단 경제적 차원에서 본다면 IMF 체제에도 가입되지 않는 투르크메니스탄은 국가부도와 같은 일이 예상될 수 없다. 대통령과 고위직 인사들의 부패와 같은 부정적인 정보 또한 정확하게 드러난 것이 없다. 교육, 의료, 주택 등 사회복지적 차원에서 대다수 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고 있는 현 정부의 안정성은 높기 때문에 현 체제는 지속적으로 유지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은 경제와 문화적 측면에서 보다 적극적인 접근을 시도하여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확실한 친한 국가의 교두보를 형성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황영삼(hwangys00@hanmail.net)은
한국외국어대학교 중앙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이다. 동 대학교 대학원 국제관계학과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러시아학술원 산하 러시아역사연구소 객원연구원 및 알파라비 카자흐국립대학교 한국학과에서 파견교수를 역임하였다.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지역연구 및 CIS 지역 고려인 문제를 연구하고 있다.
[1] 소비에트 정권 초기에 수립된 투르크멘 공화국의 수립과 독립 투르크메니스탄의 수립 과정은 완전히 다르다. 전자에 관한 심층 분석은 다음을 참고 황영삼 2015b.
[2] 할크 마ᅟᅳᆯ라하티는 1992~2008년간 운영되었던 투르크메니스탄의 최고대표기관으로, 선출과 대통령 임명으로 구성된 2,507명의 의원으로 구성되어있다. 이 기관은 공식적으로 최고 권력 및 국가 운영기관의 권한을 보유하고 있어 입법권을 가진 의회 위에 군림하여 입법 활동과 대통령의 정책 승인 및 의회 해산권을 지니고 있었다(법제처, 2016, 『투르크메니스탄 국가의 통치구조 및 법률체계』, 세계법제정보센터 4쪽).- 편집자 주
[3] 내용은 다음과 같다. ⓵ 어떠한 정치, 경제, 군사동맹이나 블럭에도 가담하지 않는다. ⓶ 군대는 평화유지와 자유수호의 수준으로 제한된다. ⓷ 대량살상 무기보유의 금지 및 육로 및 항공을 통한 무기 수송이 금지된다. ⓸ 어떤 국가도 투르크메니스탄에 군사블럭이나 동맹을 강요할 수 없다. ⓹ 외국과의 모든 분쟁은 UN을 통하여 해결한다. ⓺ 민주주의 공통 가치와 원칙을 고수하고 국내 안정을 도모한다. ⓻ 국가의 대소에 관계없이 동등한 관계를 유지한다. ⓼ 모든 행위와 업무는 인도적 원칙과 친선의 방법으로 수행한다. ⓽ 인도적 국제기구와 밀접한 협력으로 정책을 수행한다. 이에 대한 주변 내용은 다음을 참고. 황영삼 2015c, 7.
[4] ‘루흐나마’는 니야조프와 일맥상통하는 키워드로 볼 수 있다. 2001년과 2004년 두 번에 걸쳐 발간된 정신적 지침서이기도 한 동 저서는 수십 개의 외국어로 번역되어 소개되었는데 특징적인 것은 자국의 역사에 대해 독특하게 정리했다는 데에 있다.
[5]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 황영삼 2017a, 6-10.
[6] https://www.cia.gov/library/publications/the-world-factbook/geos/print_tx.html#imageModal4461 (검색일: 2019. 5. 5)
[7] 이 부분은 다음 논문에서 상세하게 다루어진다. 황영삼 2018, 165-196.
참고문헌
*본 기고문은 전문가 개인의 의견으로,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와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