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해체 후, 25년간 우즈베키스탄을 통치해 온 카리모프 대통령의 서거로, 포스트 카리모프 체제에 대한 관심은 우즈베키스탄 뿐만 아니라, 주변국에서도 매우 높아졌다. 카리모프 정부에서 총리였던 미르지요예프는 정적이었던 아지모프 수석부총리, 이노야토프 국가안보국장을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은 우즈베키스탄 정치체제의 특징인 지역파벌 구도를 적절히 유지하고 안정적으로 관리하면서, 정치경제 분야에서 대대적인 개혁조치를 단행하였다. 고질적인 문제였던 이중환율제도의 현실을 과감히 개혁하는 단일환율제를 시행하여, 공식환율과 시장환율 간 차이를 극복하였다. 그러나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의 일련의 개혁조치의 성과는 아직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으며, 성공여부는 좀 더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성동기(인하대학교)
우즈베키스탄의 이슬람 카리모프(Islam Karimov) 전 대통령이 2016년 9월 2일에 사망하면서 25년 동안 계속된 그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해 8월 28일에 러시아에서 활동하는 우즈벡 인터넷 신문 페르가나(Fergana)가 그의 죽음에 대해서 처음 보도했으며 이후 주요 해외 언론매체들이 그의 사망설을 제기하였다.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단지 그가 뇌출혈로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반복해서 발표만 할 뿐 그의 사망을 계속해서 부인했다. 그러나 9월 2일에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국영방송을 통해서 카리모프 전 대통령의 사망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2016년 8월 개최된 리우올림픽에서 금메달 4개를 획득한 우즈베키스탄 대표단을 축하해주기 위해 8월 27일 열린 환영만찬에 참가한 카리모프 전 대통령은 선수들과 보드카를 몇 잔 마시고 난 후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며, 이스라엘, 독일, 핀란드 등에서 뇌 전문의들이 급히 우즈베키스탄으로 들어왔으나, 카리모프 대통령은 이미 사망해 있었다고 차후에 알려졌다.
카리모프 전 대통령은 우즈베키스탄을 25년 동안 장기 집권한 독재자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으로 지역파벌들을 통제하여 정치 안정을 유지하였으며, 경제적으로 폐쇄적인 정책을 추진하였으나 연 8%의 성장을 지속시켰고, 사회적으로 120여 민족이 거주하지만 민족분쟁 한 번 일어나지 않는 국가로 만들었다. 우즈베키스탄 국민들은 이러한 안정과 평화를 그의 업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2005년 5월에 발생한 안디잔 사태는 지방의 열악한 경제상황, 정부군의 무자비한 무력진압, 지역파벌의 잠재적 위협 등과 같은 카리모프 정권의 숨겨진 문제점들을 보여주었다. 한편으로 그는 탈레반이 한창 세력을 확장할 때, 자국과 지역안보에 공헌하였으나, 이슬람원리주의 세력을 악용하여 국내문제를 덮어버리는 전략도 구사하였다. 결과적으로 카리모프 전 대통령은 정권의 안정과 국가 안보 우선 정책을 내세워서 정치적ㆍ사회적 안정을 추구했으나, 왜곡되고 폐쇄된 경제구조를 고수해서 나타난 경제 악화를 해결하지 못한 채 사망하고 말았다. 이것은 차기 정권이 풀어야 할 과제로 남게 되었다.
그의 사망 이후 세계는 카리모프 시대에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카리모프 전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은 채 사망했기 때문에 누가 차기 대통령이 될 것인지 다양한 분석 기사들이 나왔다. 세계 각국은 우즈베키스탄의 정국이 불안해질 것으로 전망하면서 기존의 체제가 유지되는 것이 해당국과 주변 정세에 긍정적이라고 분석하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우즈베키스탄이기 때문에 국내의 불안은 곧 중앙아시아 전체의 불안으로 확산될 수 있다. 둘째, 우즈베키스탄은 씨족 중심의 지역파벌들이 존재하는 독특한 정치시스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역파벌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면 내부적으로 불안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슬람 카리모프 전 대통령은 몇 번의 고비는 있었지만 지역파벌들을 강력히 통제하여 정권의 장기화와 국내 정세의 안정화를 달성하였다.
위와 같은 상황 때문에 차기 대권 후보들이 과연 전임자가 구축한 안정화 구도를 유지할 수 있을지 외부세계는 의문을 제시하였다. 특히 앞에서 언급했듯이, 카리모프 전 대통령이 실질적으로 후계자를 키우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포스트 카리모프 시대의 우즈베키스탄은 더 불안해 보였다.
포스트 카리모프로 거론되었던 인물은 당시에 총리였던 쇼프카트 미르지요예프(Shovkat Mirziyoyev) 수석부총리 루스탐 아지모프(Rustam Azimov), 그리고 국가안보국(SNB) 국장 루스탐 이노야토프(Rustam Inoyatov) 세 사람이었다.
1957년생인 미르지요예프는 카리모프와 같은 사마르칸트 파벌 출신이며, 이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타슈켄트 관개개량대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으로 사회활동을 시작하여, 타슈켄트 미르조 울루그벡구(區) 구청장을 거쳐 지작주(州)와 사마르칸트주(州)의 주지사를 역임하고 2003년부터 2016년까지 총리로 재직하였다. 주먹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업무 추진에 저돌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이로 인해 많은 업적도 달성하고 카리모프의 신임도 받았다. 우즈베키스탄 상류사회에서 미르지요예프는 주먹이라는 별명과 달리 주변 사람들과 관계가 모두 우호적이었으며, 특히 대통령의 의중을 잘 알고 미리 문제들을 해결해 버리는 행동 때문에 그에 대한 카리모프의 총애가 남달랐다고 한다. 러시아 언론은 이러한 이유로 이미 카리모프가 미르지요예프를 실질적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특히 미르지요예프가 사마르칸트 출신의 러시아 재벌 알리셰르 우스마노프(Alisher Usmanov)와 친척 관계라는 점도 대권에 유리한 장점으로 알려졌으며, 이로 인해 러시아 재계의 우즈베키스탄 투자가 증가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왔다.
1958년생인 아지모프는 타슈켄트 출신으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경제학 박사를 받았으며, 독립 이후에 중앙은행 총재를 역임하고 2005년부터 2017년까지 재무담당 수석부총리로 재직하였다. 우즈베키스탄의 돈줄을 쥐고 있다는 소문이 있을 만큼 해당국의 경제와 투자는 아지모프의 손을 거쳐서 진행되었고, 그는 해외에서도 어느 정도 인지도를 가지고 있었다. 아지모프는 국제회의에서도 카리모프 옆에 항상 배석하고 있어서 우즈베키스탄의 2인자로 이미 국내외에서 거론되었던 인물이었다.
미르지요예프와 아지모프 이 외에도 대권 후보로 거론되었던 이노야토프는 1944년생으로 당시에 72세라는 나이 때문에 국내외적으로 그가 대통령이 되는 것에 대한 회의적인 반응이 나왔다. 타슈켄트 파벌의 대표로 인정받는 이노야토프는 소비에트 국가보안국(KGB)의 대령 출신이며, 1995년부터 현재까지 국가안보국 국장을 역임하고 있다. 1999년 2월에 사마르칸트 파벌이 카리모프를 암살하려고 폭탄테러를 감행했지만 실패한 후 카리모프는 타슈켄트 파벌의 대표격인 이노야토프와 동맹을 맺고 타슈켄트 파벌의 지원을 받아서 정권을 장기화, 안정화 시킬 수 있었다. 특히 2015년에 카리모프의 장녀 굴로라 카리모바(Gulnora Karimova)의 부정부패 혐의가 드러났을 때, 이노야토프는 카리모프에 건의하여 그녀를 가택 감금시키고 일체 외부 활동을 못하도록 할 만큼 자신의 세력을 구축해 놓았다. 카리모프는 굴로라에게 정권을 세습시킬 계획이었으나 부정부패 사건 이후 이노야토프의 강력한 건의와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그녀를 가택 감금하는데 동의하였다. 이노야토프는 국경수비대와 세관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권력상 1인자로 평가받고 있으며, 국외에서는 킹메이커라고 그를 평가하고 있기 때문에 향후 차기 대통령은 이노야토프가 정해준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이노야토프 본인 스스로가 극도로 외부 노출을 꺼리기 때문에 우즈베키스탄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에 비해서 국내외적으로 그의 인지도는 떨어지지만, 미르지요예프, 아지모프와 함께 대선 주자로 언급되었다.
그러나 대선 운동이 시작되면서 미르지요예프의 강력한 정적이었던 아지모프는 출마를 포기하였으며, 이노야토프는 미르지요예프를 지지한다고 발표하였다. 사마르칸트 파벌과 타슈켄트 파벌의 대결과 충돌을 예상했던 우즈베키스탄 대선은 미르지요예프의 승리로 별 문제없이 끝났다. 이노야토프는 기존의 사마르칸트-타슈켄트 연합이 유지되기를 바라면서 같은 파벌인 아지모프가 아닌 미르지요예프를 지지하였다. 따라서 예상보다 평화롭게 차기정권이 탄생되었으며, 포스트 카리모프인 미르지요예프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주요 개혁 조치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이 선거 운동 기간에 발표한 공약은 모두가 예상한대로 대부분 카리모프의 모든 정책을 그대로 승계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국가 발전 목표로 “강력한 국가에서 강한 시민 사회로”로 정의하면서 나름의 민주주의 목표를 공약에서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법치를 강화하고 사법제도를 개혁할 것이라고 공약했다.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은 경제개혁을 보다 더 강력히 추진하고 거시경제의 안정과 지속적인 성장을 정책의 방향으로 정하였으며, 특히 GDP를 2030년까지 2배로 향상시키고 전체 산업부문에서 공업이 40%를 차지하게 만들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 밖에도 그는 종교적 관용성, 민족들의 조화 정책을 유지할 것이라고 했다. 외교부문에서도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은 카리모프의 정책을 유지한다고 밝혔다. 기본적으로 외국의 내정간섭 금지, 평화와 정치적 수단을 통해서 분쟁 해결, 모든 외국과 실천적 협력 등을 강화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의 국정방향을 예상하기 위해서는 그가 직면한 다음 과제를 이해해야 한다.
첫째, 안정적인 지역파벌 구도를 유지하면서 권력을 강화시켜나가야만 하는 이중적인 부담을 가지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의 정치권력은 지방 중심의 지역파벌들에게서 나온다. 카리모프는 집권 초기에 사마르칸트 파벌을 중심으로 권력을 집중시켰지만, 1999년에 타슈켄트 파벌과 연합하면서 절묘한 힘의 균형을 만들어냈다. 이후에도 그는 여타 지역파벌들의 도전을 막아내면서 정치적 안정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카리모프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인해 차기 통치자는 지역파벌이라는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카리모프가 25년 동안 정치적 안정을 추구한 것은 지역파벌을 강하게 통제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의 사후에 그 동안 불만을 가졌던 여타 지역파벌들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차기 정권에 도전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미르지요예프 정권은 기존의 안정적인 지역파벌 구도를 유지하면서 권력을 강화시켜 나가는 이중적인 부담을 가지고 출범하게 되었다.
둘째, 국정 운영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다. 미르지요예프는 무엇보다 국정경험이 부족하다. 우즈베키스탄이라는 국가의 특성상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모두 대통령이 결정해야 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그는 이러한 경험을 하기 어려웠다. 카리모프가 지속적으로 유지했던 이중환율과 불태환 정책을 미르지요예프 정권이 고수한다면, 우즈베키스탄 경제는 계속해서 침체될 가능성이 높다. 서구에 자국 시장을 개방해서 투자를 유치하면 위의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지만, 과도기적인 혼란이 발생하면 정권 안정에 치명타가 될 것이라는 전망에 미르지요예프는 시장을 개방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리고 대외관계에서도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은 카리모프의 정책을 유지한다고 약속했지만 러시아에 비중을 높게 두고 있어서 큰 변화가 예상되었다.
셋째, 카리모프 전 대통령의 잔재를 제거해야 한다. 미르지요예프는 궁극적으로 25년 동안 우즈베키스탄을 통치한 카리모프의 흔적을 지울 것이다. 따라서 국민들에게 인기 영합적인 정책을 대거 쏟아낼 수 있다. 미르지요예프 역시 장기 집권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전략이 필요할 것이다.
2016년 12월 4일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지금까지 미르지요예프가 추진한 정책들을 분석하면 위의 개인적인 과제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 정부 요직은 자신을 지지하는 인물들로 전격 물갈이 되었다. 미르지요예프는 당선 이후 내각을 구성하는 핵심인 총리, 수석부총리, 부총리, 장관 등의 자리에 자신을 지지하는 충성파 인물들을 배치하였다. 이 과정에서 미르지요예프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아지모프도 물러났다. 그러나 미르지요예프를 대선에서 지지했던 루스탐 이노야토프 국가안보국 국장은 유임되었다. 이 정책은 결국 미르지요예프가 자신을 중심으로 권력을 강화시켜 국정운영을 밀어붙이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것이며, 동시에 이노야토프를 유임시켜 타슈켄트 파벌과 외형적으로 연합이 유지되고 있음을 외부에 알리는 데 의미를 두는 것이었다. 반대로 분석하면, 이노야토프가 2018년에 74세가 되는 고령이기 때문에 미르지요예프는 그의 사망을 염두에 두고 자신을 중심으로 권력을 집중시키는 준비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둘째, 권력집중화를 위해 반부패법에 최종적으로 서명하였다. 2017년 1월 3일에 미르지요예프는 최종적으로 반부패법에 사인하였다. 이 법은 우즈베키스탄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지만, 시기적으로 제기되는 의문들이 존재하였다. 반부패법 발효 이후 부패와 연루된 200명의 국가안보국 직원이 해고되고 고발되는 등 실제로 정부차원에서 움직임이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국가안보국은 과거 KGB의 후신으로,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최고 권력집단이며, 미르지요예프의 정적인 이노야토프가 국장으로 있는 곳이다. 이러한 전후 관계를 고려해 보면, 거국적인 차원에서 부패청산이 상호간의 동의하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집권한 미르지요예프가 국가안보국을 상대로 반부패법을 앞세워 선전포고를 한 것인지 알 수는 없다. 교통경찰청, 세관, 세무서, 국책은행 등에서 근무하고 있는 공무원들은 반부패법이 발효된 후 상당히 긴장하고 있다. 쇼프카트 미르지요예프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력을 바탕으로 국가를 운영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반부패법은 이를 실현하는데 필요한 상당한 무기로 평가받고 있다.
셋째,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대출을 적극적으로 권하고 있다.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미르지요예프가 처음으로 내놓은 경제정책은 대출을 권하는 문자를 국민들에게 보낸 것이다. 2년 상환 조건으로 2만 달러 상당을 무이자 수준으로 대출해 준다는 은행광고를 대부분의 국민들이 받았다. 이 돈을 대출받아서 국민들이 소규모의 비즈니스를 하는데 사용하면 국내 경기가 부양될 것이라고 미르지요예프가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민들은 2년 상환조건 때문에 대출을 받지 않고 있다.
넷째, 우즈베키스탄은 투자 유치를 위해 무비자 15개국을 선정했다가 결국 4년 이후로 결정을 연기하였다. 미르지요예프는 2017년 4월 1일부터 한국, 일본, 미국 등 15개국 국민들이 우즈베키스탄을 무비자로 방문할 수 있다는 대통령령을 발표했다가 결국 4년 이후로 연기하고 말았다. 주로 무비자 대상국들이 우즈베키스탄 투자에 중요한 국가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위 대통령령이 발표되었을 때 해외 반응은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게다가 이러한 변화가 궁극적으로 우즈베키스탄의 만성적인 경제 문제인 이중환율과 불태환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전망까지 나왔다. 그러나 미르지요예프 정권은 2018년 2월 10일부터 한국, 이스라엘,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터키, 일본 등 7개국 시민이 30일 동안 무비자로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환율단일화 조치와 시장 변화
미르지요예프 정권의 최대 개혁은 2017년 9월 5일에 발표한 환율단일화 조치라고 할 수 있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발표된 9.5 환율단일화 조치는 우즈베키스탄 시장에 큰 변화를 야기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독립 이후부터 우즈베키스탄의 환율시장은 공식환율, 시장환율, 상업환율 3가지가 존재했는데, 공식환율과 시장환율의 격차가 2배 혹은 3배에 달했다. 따라서 대부분의 우즈베키스탄 주민들과 외국인들은 2-3배 높은 시장환율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해당 국가의 외화는 시장으로 유입되고 거래될 수밖에 없었다. 은행에서는 단지 시장환율보다 낮은 가격으로 달러를 우즈베키스탄 화폐인 숨(soum)으로만 환전해 주었기 때문에 주민들은 시장을 통해서만 달러를 살 수 있었다. 궁극적으로 우즈베키스탄 내에 존재하는 달러는 은행을 통해서 정부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시장으로 유입되었다.
만성적인 이중환율과 불태환으로 인해서 한국, 중국 등 일부 국가들의 투자 외에는 대부분의 외국 기업들이 투자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대대적인 경제개혁이 필요하다고 미르지요예프 정권은 심각하게 이를 인식한 것으로 예상된다.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자국 내에 존재하는 달러는 은행이 아닌 시장에서 대부분 거래되고 있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만성적인 외환부족을 해결하기 위해서 시장의 달러를 은행으로 유입할 정책이 필요했다.
실제로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환율단일화 조치 이전까지 시장환율을 없애기 위해서 시장환율을 공식환율로 맞추게 하려고 시도했지만 시장환율은 오히려 매년 올라갔다. 따라서 최종적으로 내린 결정은 2017년 9월 초에 1$=4,000숨이었던 공식환율을 1$=8,000숨이었던 시장환율에 맞추는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공식환율을 시장환율에 맞추어서 환율단일화를 추진하였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
첫째, 기업 가치가 2배로 폭락했는데, 예를 들면, 기존에 10,000달러의 가치를 가졌던 기업은 환율단일화 조치 이후 5,000달러로 가치가 하락되었다. 둘째, 우즈베키스탄 내 모든 기업들은 외국으로부터 물자를 수입하면 기존의 대금보다 2배를 더 지불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10달러의 물자를 수입하면, 기존에는 공식환율에 따라 40,000숨으로 1달러를 만들어서 지불하면 되었지만, 지금은 80,000숨으로 지불해야 한다. 셋째, 수출을 하면, 기존보다 두 배의 수익을 얻기 때문에 수입 부분이 상쇄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수출하는 기업보다는 수입하는 기업들이 많은 현실에서는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외환보유고를 증가시키고 유지하는데 여전히 어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다. 넷째, 수입 대금의 지불이 2배로 증가하면서 국내 물가가 사실상 2배로 폭등하였으며, 기존에 공식환율에 맞추어서 가격을 통제했던 생필품의 가격도 2배로 올랐다. 다섯째, 우즈베키스탄의 대부분 기업들에 종사하는 급여생활자들은 기존에 공식환율에 맞추어서 급여를 받았기 때문에 환율단일화 조치 이후 그들의 급여 수준은 2배로 폭락했다.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환율단일화 조치와 함께 50,000숨 화폐를 발행하였는데, 기존에는 10,000숨이 최고액 화폐였다. 최근에 우즈베키스탄 주민들은 100,000숨 화폐가 곧 나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는데, 이처럼 솜 가치가 계속해서 하락하고 있다.
러시아 중심의 대외정책 노선
미르지요에프 정권은 집권 이후 지금까지의 대외정책은 친러시아적 경향을 띠고 있다. 이러한 평가의 중심에는 미르지요예프와 친척관계를 가지는 러시아 재벌 우스마노프가 있다.
1953년 9월 9일생인 우스마노프는 우즈베키스탄 동부에 위치하는 페르가나 지방의 공업도시인 추스트(Chust)에서 출생하였으며, 검사였던 아버지를 따라서 수도인 타슈켄트로 이주하여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는 외교관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모스크바에 소재하는 국제관계대학교에 입학하였다. 1976년 국제법을 전공하고 졸업한 우스마노프는 타슈켄트로 복귀하여 대외경제협회의 책임자로 일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1980년에 사기 혐의로 체포된 우스마노프는 8년 형을 선고받고 6년 동안 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고르바초프에 의해서 사면되었다. 그는 사기혐의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았다고 주장하였는데, 이후 그의 혐의는 조작되었다고 판결되었다. 다른 러시아 재벌들처럼 알리셰르 우스마노프 역시 러시아의 체제전환기에 지하자원 개발을 통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는 철광산 개발과 투자에 집중하였으며, 1999년에 합작으로 설립된 메탈로인베스트(Metalloinvest)의 최대 수혜자이자 주주가 되었다. 현재 러시아의 철ㆍ비철금속 개발과 투자는 우스마노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할 만큼 그의 영향력은 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하자원의 개발과 투자 외에도 우스마노프는 이동통신과 IT 분야에 적극적으로 투자하여 그의 부를 지속적으로 축적하였다. 그는 러시아 이동통신시장 점유율 2위를 차지하고 6,500만 명 이상의 가입자를 보유한 메가폰(Megafon)의 공동소유자이며, 러시아 최대의 인터넷업체인 Mail.ru의 지분 17.9%를 보유하고 있는 공동소유자이기도 하다. 옐친 집권기에 러시아 재벌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했고, 푸틴 집권 이후 영국으로 망명을 떠난 언론재벌 보리스 베레조프스키의 신문사 코메르산트(Kommersant)를 우스마노프가 2006년에 사들이면서 미디어 분야에도 진출하였다. 그는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스포츠분야에 투자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사가 되었다. 2007년 8월에 영국의 유명한 프로축구단 아스날(Arsenal F.C)의 지분 14.58%를 인수하여 실질적인 구단주가 되었다. 우스마노프 역시 젊은 시절에 국가대표 펜싱선수였을 만큼 펜싱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여 국제펜싱연맹의 회장도 역임하였다.
우스마노프가 고향인 우즈베키스탄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게 된 사건은 2007년 12월에 예정되었던 우즈베키스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카리모프가 3선 연임에 걸려서 출마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우스마노프가 차기 대통령으로 거론된다고 라디오자유유럽이 10월 16일자 기사로 보도하면서부터이다.
카리모프는 러시아,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와 달리 재벌 중심의 국가 경제 발전을 선호하지 않았다. 폐쇄적인 경제구조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개인 재벌을 통한 경제 발전보다는 국가가 주도하는 경제발전이 필요했다. 따라서 자국 내에 재벌이 출현할 수 없도록 개인 사업자들을 강력하게 통제하였다. 따라서 우즈베키스탄에는 고위 관료 출신의 부자만이 있을 뿐 사업을 통해 성장한 재벌은 전무하다. 따라서 카리모프 정권은 우스마노프와 같은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러시아 재벌이 모국에 투자하는 것도 사실상 반기지 않았다.
그러나 미르지요예프는 자국의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우스마노프와 다양한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9.5 환율단일화 조치도 사실상 우스마노프의 권고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이 조치 이후 우스마노프는 우즈베키스탄의 주요 정부 프로젝트 사업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투자도 진행하고 있다. 미르지요예프는 우스마노프 외에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우즈베키스탄 출신 재벌들의 투자를 요청하고 있다.
우스마노프는 미르지요예프에게 경제적 목적뿐만 아니라 정치적 목적으로도 이용할 가치가 높은 존재이다. 우스마노프의 최대 강점은 다른 어떤 러시아재벌들보다도 푸틴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데 있다. 무슬림인 우스마노프의 부인은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출신의 유태인 이리나 비네르(Irina Viner)로 소비에트시기에 리듬체조 우즈베크 대표를 지냈던 운동선수였으며, 한 명의 아들을 가진 이혼녀였다. 비네르는 남편을 따라서 러시아로 이주하면서 영국과 러시아에서 각각 리듬체조 국가대표 코치를 역임하였다. 푸틴에게 적대적이었던 보리스 베레조프스키의 신문사 코메르산트를 인수한 우스마노프는 그로부터 높은 신임을 얻게 되었고, 이와 동시에 그의 부인은 푸틴 대통령과 매우 친밀한 관계라고 알려진 러시아 리듬체조 국가대표 선수이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알리나 카바예바(Alina Kabaeva)를 푸틴에게 소개하였다.
미르지요예프의 위와 같은 커넥션은 우즈베키스탄이 러시아에 의존적으로 갈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미르지요예프는 우즈베키스탄의 중요 농작물이자 수출 효자 종목인 목화 생산량을 줄이고 이를 위해서 점차적으로 목화밭을 없앤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목화밭이 없어진 곳에는 러시아 수출을 목표로 다양한 과일들이 재배되고 있다.
기회 요인
미르지요예프 정권은 집권 초부터 카리모프 정권이 구축해 놓았던 다양한 문제점들을 개선하는 개혁들을 과감하게 추진하고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점들은 우즈베키스탄 발전에 기회가 될 수 있다.
첫째, 만성적인 관료주의 철폐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공항에서부터 관료제의 철폐를 시작하였다. 특히 세관신고를 간소화 하였는데, 기존에는 입국할 때 두 장의 세관신고서를 동일한 내용으로 작성하고 세관원에게 내면 한 장을 받고 이것을 출국할 때까지 보관해야만 했다. 그리고 출국할 때, 다른 한 장의 세관신고서를 작성하여 입국할 때 받았던 한 장의 세관신고서와 같이 제출해야 했다. 이 때 입국할 때 가져왔던 왔던 금액보다 출국할 때 신고한 금액이 적어야만 했다. 그리고 수시로 세관원들이 불신검문을 하는 등 만성적인 관료주의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미르지요예프는 컨테이너에 불법으로 금을 가지고 들어온다고 해도 검사하지 말라고 하면서 관료주의의 적폐를 청산하라고 명령했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둘째, 경제발전 우선주의
앞에서 언급했듯이, 미르지요예프 정권은 26년 동안 지속되었던 이중환율을 단일화시키면서 자국 시장의 개혁의지를 세상에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외국에 주재하고 있는 자국 대사관에 투자유치를 할당시키고 있다. 무엇보다 미르지요예프가 경제발전 우선주의를 추진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는 우스마노프와 같은 본국 출신의 거대 재벌의 투자를 유치하는 것이다. 과거 카리모프 정권의 정책을 승계하겠다는 공약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 미르지요예프의 경제 개혁이 앞으로도 지속성을 가질 것으로 예상케 한다.
우려 사항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2018년 2월 12일에 개최된 “한국-우즈베키스탄 비즈니스 다이얼로그”를 통해서 자국의 변화된 시장 환경을 제시하면서 한국 기업들을 유치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우즈베키스탄에 투자하고자 하는 국내 기업들은 다음과 같은 점들을 고려해만 할 것이다.
첫째, 환전과 과실송금의 실질적인 보장.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환율단일화 조치를 지금까지 철저하게 유지하고 있으며, 해당 국가의 주민들도 위험을 무릅쓰고 시장에서 거의 환전하지 않는다. 따라서 기업인들의 입장에서는 이제부터 환전과 과실송금이 가장 중요한 문제로 남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점들은 왜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공식환율을 시장환율에 맞추었느냐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시장으로 유입되는 달러를 은행으로 돌려서 외환보유고를 늘리겠다는 것이 환율단일화 조치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 우즈베키스탄에서 투자하고자 하는 기업들은 환전에 대한 명확한 법적이고 현실적인 보장이 없다면 기존에 해당 국가에 투자했던 기업들보다 더 나은 상황이 될 수 없다. 예를 들면, 기존에는 비록 환전에 대한 규제는 심했지만, 투자 기업의 입장에서는 시장환율에 해당하는 숨으로 사업을 하고 공식환율에 해당하는 달러로 환전을 받아서 2배 이상의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우즈베키스탄 외국 기업들은 환전을 받게 되는 날을 소위 로또의 날이라고 했다.
둘째,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필요로 하는 사업에 투자. 기본적으로 우즈베키스탄은 자국의 경제발전에 필요한 부분에 외국 기업들이 투자하기를 원하고 다양한 혜택을 제공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원하는 부분에 투자하지 않으면 환전이나 과실송금에 있어서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외환보유고가 많지 않기 때문에 우즈베키스탄 입장에서는 당연하게 이러한 차별을 줄 것이다. 우즈베키스탄에 투자를 원하는 기업들은 자기업의 기술력과 노하우를 믿고 해당 국가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국제사회의 기준에서 벗어나 있는 우즈베키스탄의 시장 환경을 철저히 분석하고 투자해야만 자기업의 기술력과 노하우가 빛을 발할 것이다.
2018년 2월 12일에 개최된 “한국-우즈베키스탄 비즈니스 다이얼로그”는 분명히 우즈베키스탄의 독립 이후 기존의 양국 사이에서 개최되었던 모든 경제교류회의들 보다는 긍정적인 내용이 많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26년 동안 만성적으로 왜곡된 시장 환경을 가졌던 우즈베키스탄이기 때문에 오히려 과거보다 더 철저하게 해당 국가의 경제 상황을 분석할 필요가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개혁의 성공 여부에 촉각
미르지요예프 정권이 출범하고 난 후 지난 26년 동안 우즈베키스탄의 다양한 부문을 지배했던 폐쇄적 관료주의를 철폐하는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2016년 12월 4일 출범한 미르지요예프 정권은 이제 1년 반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지난 1년 동안 그가 추진했던 개혁들의 결과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긍정적인 결과도 부정적인 결과도 아직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 부문에서는 다른 씨족들과 아직까지는 충돌이 없으며, 오히려 반부패법을 통해서 자신의 세력을 강화시켜 나가고 있으며, 사회 부문에서도 기존의 상태는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 부문은 공식환율을 시장환율에 맞추는 역 환율단일화를 결정하고 지금까지 추진하고 있기 때문에 향후 상황을 지켜보아야 그 결과를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환율단일화가 성공한다면 경제가 다시 성장할 가능성이 있지만, 반대로 실패한다면 경제는 큰 혼란을 겪을 수 있으며, 이러한 결과는 정치, 사회부문까지도 영향을 줄 수 있다.
미르지요예프 정권은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이 독립 직후부터 추진했던 경제개혁을 이제야 시작한 것이다. 양국은 석유, 가스와 같은 풍부한 에너지 자원을 보유하고 있어서 개혁에 따른 문제점들을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즈베키스탄은 이러한 장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집권 1년 만에 과감하게 추진한 미르지요예프의 개혁은 좀 더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
성동기 교수(214168@inha.ac.kr)는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에 재직 중이다.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우즈베키스탄 역사아카데미(History Academy of Science of Uzbekistan)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하여 중앙아시아의 정치경제, 역사에 관한 폭넓은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본 기고문은 전문가 개인의 의견으로,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와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