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에트 말기에 카자흐스탄은 지리적·경제적·인구적·언어적 제약을 안은 채 독립의 도정에 올랐다. 그렇기 때문에 체제전환과 동시에 시작된 새로운 민족·국가 건설 과정은 매우 힘들고 도전적인 과제일 수밖에 없었다. 포스트소비에트 민족·국가 건설의 필요성으로 카자흐스탄 정부가 활발하게 벌이고 있는 활동 중의 하나는 새로운 기념물 건립이다. 이 글은 포스트소비에트 카자흐스탄 정권이 건립한 기념물 가운데 소비에트 과거에 대한 기념물, 그중에서도 2차 대전 관련 기념물과 억압의 희생자 기념물을 살펴봄으로써 정권이 구성하려는 소비에트 과거의 기억과 그 함의를 논의한다.
김태연(서울대학교)
카자흐스탄이 독립된 주권국가로 세계무대에 등장한 것은 1991년 12월 말 소비에트연방(USSR)이 15개 독립국가로 해체된 거대한 역사적 변동의 결과이다. 카자흐스탄의 독립으로 인류는 세계에서 가장 큰 내륙국이자 세계에서 9번째로 넓은 영토와 석유·가스 등 풍부한 천연자원을 보유한 신생국의 출현을 목도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처럼 독자적 존립과 발전의 물질적 조건이 충분해 보이는 카자흐스탄이 독립을 선포한 것은 소비에트연방 붕괴가 공식화되기 불과 열흘 전인 1991년 12월 16일이었다. 카자흐스탄은 마치 마지막까지 소연방 해체를 원하거나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이 구소련을 구성하고 있던 15개 연방공화국(SSR)들 가운데 가장 늦게 독립을 선언하였다.[1] 또한 이보다 앞서 1991년 12월 8일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3개 슬라브 연방공화국이 소연방을 대신하여 독립국가연합(CIS)을 창설하기로 결정하자, 5개 중앙아시아 연방공화국도 이에 합류하기로 하였고, 이를 주도한 것도 카자흐스탄이었다(Hiro, 2009).
이렇듯 카자흐스탄이 소연방으로부터의 분리·독립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이유는 러시아와의 밀접한 혹은 의존적 관계를 급격하게 단절하기가 결코 쉽지도, 반드시 유리하지만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카자흐스탄의 지리와 경제, 인구와 언어 상황을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의 국경은 7,150km 이상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길며, 양국은 서로에게 가장 긴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인접국이다. 국경 획정 및 그 안정적 유지는 근대국가의 필수요건으로 소연방 해체 이후 (초)국경문제는 지금도 양국 간 안보·경제협력의 바탕이 되는 공동 관심사이다. 지리적 인접성은 경제적 연계성으로 이어지기 쉬운데, 소비에트시기에 카자흐스탄은 소연방, 특히 러시아 경제와의 통합 수준이 가장 높은 연방공화국이었다(김영진, 2009). 카자흐스탄에 대한 러시아의 경제적 영향력은 에너지 부문을 중심으로 독립 이후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또한 소비에트 말기였던 1989년 카자흐스탄 인구에서 러시아인의 비율은 37.6%였고, 독립 이후 그 수가 대폭 감소했음에도 불구하고 2009년에도 이들의 비율은 23.7%에 이르고 있었다. 러시아인은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카자흐스탄 인구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하는 민족이다. 그리고 소연방 해체 당시, 도시 카자흐인 및 러시아인이 많이 사는 북동부 지역주민의 대다수는 주로 러시아어 사용자였고(Dave, 2007), 2009년에도 카자흐스탄 전체 인구에서 러시아어 구사자 비율(94.4%)이 국가 공식어인 카자흐어 구사자 비율(74%)보다 높게 나타났다(Агентство Республики Казахстан по статистике, 2010). 러시아인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어 역시 소비에트시기에 이어 포스트소비에트 시기에도 카자흐스탄 사회를 구성하는 주요 요소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온전한 독립을 이루는 데 상당한 제약과 어려움을 안은 채 포스트소비에트 카자흐스탄이 출범하게 되었다는 점은 소비에트 시기와 구별되는 새로운 민족 및 국가를 건설하고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영역에서 지난한 노력이 기울여져야 함을 의미했다. 카자흐스탄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구소련 공화국에서 기존의 지배 엘리트가 교체되지 않았는데, 구체제의 정치 엘리트가 통치하는 신생국들에게 민족·국가 건설은 결코 녹록치 않은 과제였다. 이러한 가운데 위에서 논의된 것처럼, 소비에트 말기 카자흐스탄에서는 독립을 위한 사회경제적 여건도 여의치 않았고, 독립을 쟁취하려는 정치적 움직임도 두드러지지 않았기 때문에, 마치 ‘우연히’ 주어진 것처럼 보일 수 있는 독립과 정권의 정당성을 찾기가 그만큼 더 힘들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독립 직후 카자흐스탄을 포함한 모든 구소련 공화국들이 착수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의 체제전환은 대다수 국민들에게 심각한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을 초래했다.
새로운 민족·국가 건설의 필요성은 절실한 반면에 그 가시적 성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정치 엘리트는 대중의 지지를 얻고 참여와 헌신을 이끌어내기 위해 이들의 의식과 감정에 호소할 유인과 필요를 느끼게 되는 법이다. 이때 사회구성원들의 집단적 정체성과 기억을 (재)구성하여 이들을 통합 혹은 동원함으로써 민족·국가 건설 과정을 진척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 중의 하나가 기념물 건립이다.
기념물은 역사에 대한 특수한 시공간 내에서의 해석, 인식, 정서가 형상화된 상징물이다(한성훈, 2008). 이는 기념물이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이에 대한 기억의 구성을 통해 현재의 사회구성원들에게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시 말하면 누구나 볼 수 있고 주변에 있다면 볼 수밖에 없는 시각적 조형물인 기념물의 주요 기능 중 하나는 누가 국가의 구성원인지는 물론 누가 정치적 권력의 정당한 보유자가 될 수 있는지를 공공연하게 보여주고 지시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변화와 위기의 시기에 정치적 행위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에 대한 요구와 사회에 대한 비전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념물을 이용하게 된다(Forest and Johnson, 2011).
포스트소비에트 카자흐스탄은 새로운 기념물 건립 활동을 매우 활발하게 벌이고 있는 나라이다. 그리고 독립 이후 카자흐스탄에서 신설된 많은 기념물 가운데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역시 카자흐 역사, 문화, 인물을 형상화한 조형물이다. 이러한 기념물은 카자흐인의 역사적·민족적 자긍심과 공동체 의식을 함양·고취하기 위한 상징물로 자민족 중심의 기념물을 새로 설립하는 일은 신생 독립국 정권의 정체성 형성 및 정당성 확보 노력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행위이다. 한편으로 포스트소비에트 카자흐스탄의 자민족 중심주의는 소비에트 시기에는 충분히 표출되지 못했던 자민족 의식의 자연스러운 발로라는 측면을 갖는다. 다른 한편으로 소비에트 말기에 러시아인의 비중이 상당히 높았고 카자흐인이 소비에트 민족 가운데 가장 러시아화된 민족이었던 카자흐스탄에서 자민족화 현상은 러시아 민족과의 뚜렷한 구별을 위해 의도된 정치적 행위이기도 하다.
이 글은 포스트소비에트 카자흐스탄에서 건립된 여러 기념물 중에서도 소비에트 시기의 사건이나 인물을 표상하기 위해 과거와 현재의 수도에 들어선 기념물을 살펴봄으로써, 현재 카자흐스탄 정부가 소비에트 과거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논의하고자 한다. 언급했듯이, 소비에트연방은 카자흐스탄이 지나치게 의존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로 인해 자신의 독립에 제약이 되기도 했던 정치체였다. 따라서 카자흐스탄 현 정권이 소비에트 시기의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검토하는 작업은 단지 과거사 인식을 규명하려는 시도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는 카자흐스탄 정권이 자기 자신과 소연방 계승국인 인접 강대국 러시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자신과 타자와의 과거에 대한 현재적 인식에 발을 딛고 어떠한 미래를 향해 걸어가려 하는지를 가늠하게 해줄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그 가운데 특히 독소전쟁은 소비에트연방과 러시아에서는 ‘대(大)조국전쟁(Great Patriotic War)’으로 일컬어졌고,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와 영웅적 행위로 기억·기념되는 역사적 사건이다.[2] 이와 관련하여 소비에트시기에 구소련 주요 도시에는 승전의 영예를 기리기 위해 대체로 웅장한 규모와 비장한 분위기로 조성된 전승 공원, 꺼지지 않는 불꽃, 기념탑, 동상 같은 기념물들이 매우 많이 건립되었다. 후방에서 소연방의 전쟁 수행을 지원했고 지금도 러시아인이 많이 살고 있는 카자흐스탄에도 이처럼 영광스러운 승리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다수의 2차 대전 관련 기념물이 세워졌고, 현재까지도 이들은 대체로 잘 보존되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포스트소비에트 시기 들어 카자흐스탄에 세워진 2차 대전 관련 기념물은 소비에트 시기의 그것과는 다소 다른 맥락과 함의를 갖는다. 예를 들면 2009년 5월 9일 승전기념일을 앞두고 카자흐스탄 수도 아스타나(Astana) 시 당국은 공론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역사적 가치가 없고 유지비용이 들며 매년 정돈하기가 어렵다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1995년 구 소비에트 지구에 설립된 대조국전쟁 전사들 기념물을 철거하여 주민들의 불만을 산 바 있다(Казахстан Сегодня, 2009/05/09). 카자흐인과 슬라브인 두 병사의 입상(立像)을 중심으로 구성된 이 기념물은 2015년 승전기념일에 맞추어 다시 설치되었다. 그렇지만 이 기념물이 석연치 않은 설명과 함께 철거되었다가 명확한 해명 없이 복원된 과정은 당국이 이 기념물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거나 적어도 이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음을 말해준다.
반면에 카자흐스탄 당국이 적극적으로 신설하고 있는 2차 대전 관련 기념물은 카자흐인 참전영웅의 동상이다. 예를 들면 1997년 10월까지 카자흐스탄 수도였던 알마티(Almaty)[3] 중앙공원의 거대한 레닌 동상이 서 있던 자리에 두 카자흐인 여성 전쟁영웅 몰다굴로바(Aliya Moldagulova)와 마메토바(Manshuk Mametova)가[4] 나란히 행진하는 모습의 기념물이 건립되었다. 이 카자흐인 기념물이 구 소비에트 정부 청사를 마주보고 있던 레닌 동상을 대신하여 들어섰다는 점과 기념물 받침대에 두 인물의 성(姓)이 표기된 것이 아니라 이름만 카자흐어로 새겨져 있다는 점은 동상이 전하려는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저격병이었던 몰다굴로바와 기관총 사수였던 마메토바가 실제로는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이 기념물의 형상화는 역사적 사실과는 부합하지 않는다. 한편 아스타나에서도 2008월 7월과 2018년 7월 ‘아스타나의 날’에 즈음하여 몰다굴로바 동상과 마메토바 동상이 각각 구 소비에트 지구의 대조국전쟁 전사들 기념물에 맞은편에 세워졌다.
또한 2016년 10월에는 아스타나의 대통령궁으로부터 멀지 않은 도심부에 1945년 4월 베를린 제국의회 의사당에 처음으로 소련기를 걸어 올렸던 인물 중 한 명인 카자흐인 소련군 장교 코쉬카르바예프(Rakhimzhan Qoshqarbaev)가 깃발을 휘날리는 형상의 동상이 제막되었다. 소비에트 시기에는 코쉬카르바예프가 전쟁영웅으로 서훈을 받지 못했는데, 베를린 심장부에 적기(赤旗)를 세워 올림으로써 2차 대전에서 독일의 패망을 상징하게 되는 역사적 사건의 주역 중 한 명으로 카자흐인이 공식 인정될 수 있었던 것은, 러시아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기까지 했던 카자흐스탄 연구자의 오랜 노력의 결과이다. 이 동상은 설립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맥락이 카자흐인과 카자흐스탄에게는 매우 특별한 의미와 가치를 갖는 기념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포스트소비에트 시기 새로운 기념물 건립을 통해 카자흐스탄 정부가 2차 대전을 기억하는 방식과 내용은 소비에트 시기 및 현재 러시아의 그것과는 다소 다르다. 카자흐스탄 영토는 2차 대전 중에 전투가 직접 벌어졌던 곳이 아니기 때문에, 카자흐스탄은 소연방이나 러시아처럼 2차 대전의 기억을 국가적 승리와 긍지의 기억으로 전유할 수 없다. 그렇지만 카자흐스탄 당국은 카자흐인 참전용사들에게 헌정된 기념물 설립을 통해 이 명예로운 승전의 역사에 카자흐스탄도 일정 정도 기여한 바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알마티의 몰다굴로바와 마메토바가 지구 위에서 새와 함께 뛰노는 아이들을 뒤로 하고 걸어 나가는 모습은 마치 후손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순교의 길을 떠나는 이들의 결연한 의지를 표현하는 듯하다. 결국 새로운 2차 대전 관련 기념물을 세움으로써 카자흐스탄 정권이 대중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현재의 카자흐스탄이 민족과 국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윗세대의 영웅적 행동을 토대로 하여 건설된 자랑스러운 나라임을 되새겨 기억하라는 요청이라고 하겠다.
전쟁 기념물과 더불어 포스트소비에트 카자흐스탄에서 활발하게 건립되고 있는 기념물은 소비에트 시기의 억압 정책으로 인해 발생한 희생자를 기억하기 위한 기념물이다. 포스트소비에트 카자흐스탄 전쟁 기념물이 소비에트 시기에도 세워지고 있던 조형물의 소재에 새로운 형상과 의미가 입혀져 다시 만들어지고 있는 기념물이라면, 희생자 기념물은 소비에트 시기에는 전혀 다루어지지 못한 소재를 대상으로 하여 제작되고 있는 기념물이라는 점에서 카자흐스탄 정권이 소비에트 과거를 바라보는 시각의 또 다른 측면을 드러내는 상징물이다. 카자흐스탄에서는 1997년부터 대통령령에 따라 5월 31일이 ‘정치적 탄압 희생자 기념일’이라는 국가 기념일로 제정되었다.[5]
최근에 아스타나와 알마티에 들어선 희생자 기념물은 1930년대 기근의 희생자 기념물이다. 우선 2012년 ‘정치적 탄압 희생자 기념일’에 아스타나 구 소비에트 지구에 ‘1932-1933년 기근 희생자 기념물’이 세워졌는데, 하늘을 향해 기도하는 여인상을 중심으로 전체적으로 검은색으로 구성된 이 기념물이 기근의 비극성을 표현하고 있기는 하지만, 특정 민족, 즉 카자흐 민족의 희생자성을 구체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기념물 제막식에 참석한 나자르바예프(Nursultan Nazarbayev) 대통령도 기근으로 인해 카자흐스탄에서 150만 명이 사망했다고 하면서도 “기근은 카자흐스탄뿐만 아니라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에서도 일어났다”고 언급했고, “우리의 주요 목적은 모든 카자흐스탄 국민의 번영”이라면서 이를 위해서는 “안정, 평화, 통합”을 간수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발언으로 연설을 마무리했다. 카자흐인이 소비에트시기에 억압의 고통과 시련을 겪은 희생자이기는 하지만, 이 문제가 민족화 혹은 정치화되어서는 안 될 것을 당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017년 ‘정치적 탄압 희생자 기념일’에 알마티에 건립된 ‘1931-1933년 기근 희생자 기념물’은 아스타나의 기념물과는 상이한 형태로 만들어져 다른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하다. 과거에 카자흐스탄인들이 총살당한 곳이었던, 구 KGB 건물 인근의 작은 공원에 들어서서 기근으로 인해 앙상해진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형상화한 이 동상은, 제막식에 참석한 알마티 시장의 말에 따르면, “카자흐 민족의 모든 슬픔을 구현”하고 있다. 아스타나의 기념물이 기근이라는 비극적 사건에 처한 이들의 기원 혹은 호소를 표현함으로써 그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있다면, 알마티 기념물의 장소성과 형상화는 소비에트 시기 탄압의 현장에서 억압적 정책의 결과로 야기된 기근으로 인해 고통 받는 약자를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기근, 넓은 의미에서는 탄압의 피해를 보다 생생하게 증언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 같은 소재를 재현한 두 상징물의 상이한 표현 방식이 소비에트시기에 입은 억압의 피해와 희생에 대한 보다 민족화된 해석, 나아가 소비에트 시기 억압의 역사 그 자체에 대한 보다 비판적인 인식으로 이어질지는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볼 문제로 보인다.
소비에트 시기에는 금기시되었던 이슈를 다룬 또 다른 기념물로 들 수 있는 것은 2006년 9월 알마티에 세워진 ‘자유의 여명’ 기념물, 일명 젤톡산(Jeltoqsan) 기념물이다. 젤톡산은 ‘12월’을 뜻하는 카자흐어 단어인데, 1986년 12월 당시 카자흐스탄의 카자흐인 최고 지도자를 러시아인 당 관료로 경질한 소비에트 중앙정부의 결정에 대해 알마티 청년층이 항의시위에 나서면서 발발한 대중봉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유혈사태로까지 번진 이 사건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수백 명에서 천 명 이상으로 추정될 정도로 아직까지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소비에트 정권은 카자흐 민족주의의 발현에 의한 소요사태라는 부정적 의미를 부여하려 했던 이 민감한 사건이 일어난 지 20년이 지난 2006년 9월 사건이 벌어졌던 장소에 이를 기억하기 위한 기념물이 들어섰다.
그런데 이 기념물은 외형만 보아서는 젤톡산 기념물임을 알기 힘들 정도로 추상성과 상징성이 매우 강하다. 피와 희생을 의미하는 붉은색 탑문과 젊음과 희망을 의미하는 흰색 탑문이 갈라지는 형상은 민중 자의식의 각성, 이념적 규범의 붕괴, 자유와 독립의 승리를 상징하며, 중앙에서 두 탑문을 연결시키는 여성이 오른손에 쥔 바람에 나부끼는 수건은 화해의 호소를, 왼손에 쥔 새는 자유에 대한 지향을 표상한다(Сулейменов, 2006.9.19.). 흰색 탑문에 양각된 글귀는 카자흐스탄 국가 가사의 일부로 독립과 통합을 노래하는 부분이다. 제막식 연설에서 나자르바예프가 강조한 것도 진실 규명이나 희생자 위로보다는 카자흐스탄 독립의 정당성이나 민족 통합의 당위성 같은 추상적 가치였다. 즉 소비에트 권력기구의 가혹한 진압과 그로 인한 희생을 언급하기도 했지만, 연설에서 그가 보다 역점을 두어 전달하려 한 메시지는 사건의 희생자들이 원했던 정의, 평등, 우애, 독립 및 국가 번영을 위한 통합과 안정의 필요성이었다(Сулейменов, 2006.9.19.).
포스트소비에트 카자흐스탄에서 신설된 소비에트 시기에 관한 기념물의 형상과 의미를 간략하게나마 살펴본 결과, 다른 나라에서도 그렇겠지만, 특히 독립의 조건이 불리했던 카자흐스탄에서 기념물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독립 이후 민족·국가 건설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한 목적의식과 정치성을 짙게 내포한 상징물임을 알 수 있다. 포스트소비에트 시기에 세워진 카자흐스탄의 전쟁 기념물은 소비에트 시기의 전쟁 기념물과 달리 장엄하게 승전국의 영광과 위용을 과시하지 않는다. 그 대신 포스트소비에트 카자흐스탄의 전쟁 기념물은 주로 카자흐인 전쟁영웅 개개인을 발굴하여 알리고 기념하는 데 주력하는 듯이 보인다. 그렇지만 이러한 기념물 건립 활동을 활발히 벌이는 정권의 의도가 과거의 참전용사들이 카자흐스탄의 수호와 독립에 공헌했듯이 현재의 국민들도 조국 발전과 번영에 기여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카자흐스탄에서 개인이나 개인적 가치보다 국가 혹은 국가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집단주의적 사고는 시대를 초월하여 면면하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소비에트 시공간에서는 체제의 희생자 기념물 건립이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는 포스트소비에트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희생자 기념물은 현 정권의 소비에트 과거에 대한 인식을 보다 여과 없이 드러내 보여주는 매개물이 될 수 있다. 포스트소비에트 카자흐스탄에 세워진 희생자 기념물은 소비에트 시기의 카자흐인 희생자를 때로는 구상적·사실적으로 묘사하기도 하고, 때로는 추상적·상징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종종 내용을 담아내는 형식이 내용을 말해주거나 심지어는 내용을 결정할 수도 있다. 포스트소비에트 카자흐스탄에서 소비에트 시기의 희생자를 표상하기 위한 방식이 확정적이지 못한 것은, 카자흐스탄 사회와 국가가 소비에트 시기 억압의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재현할지 그 방향을 아직 정립하지 못한 현실의 반영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듯 카자흐스탄에서 소비에트 과거에 대한 기억의 문제가 지금도 해결되지 못한 난제로 남아 있는 것은, 독립의 제약으로 작용했던 요인들이 그 정도는 약해졌지만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구조적 조건과 독립 이후 민족·국가 건설의 과제가 여전히 미완의 상태로 진행 중인 사회정치현실이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태연(antiwar99@hanmail.net)은
모스크바국립대학교(MSU)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현재 서울대학교에서 강의 중이다. 주요 관심 분야는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의 민족주의, 민족문제, 이슬람, 도시풍경 등이며, 주요 저서로는 <유라시아의 심장 다시 뛰다!>(공저), <카프카스 역사와 지정학>(공저) 등이 있다.
[1]1988년 11월 에스토니아 연방공화국이 처음으로 주권선언을 하고, 심지어 일부 연방공화국의 지역들도 주권선언을 하는 상황에서, 카자흐스탄의 독립선언은 매우 늦고 소극적인 움직임이었다고 할 수 있다.
[2]지금도 러시아에서는 거의 모든 여론조사에서 다수의 응답자들이 가장 의미 있는 역사적 사건 혹은 시기로 대조국전쟁(2차대전)을 수위로 꼽으며, 승전기념일인 5월 9일은 전국적으로 매우 성대한 경축 행사가 벌어지는 뜻깊은 국경일이다.
[3]1929년에서 1997년까지, 즉 소비에트 시기 대부분 동안 그리고 포스트소비에트 초기까지도 카자흐스탄의 수도는 알마티였다.
[4]몰다굴로바는 1942년 만 17세의 어린 나이에 적군(赤軍)에 자원입대했고, 저격병 군사교육을 받은 후 1943년 7월 전선으로 투입되어 1944년 1월 전투 중에 입은 부상으로 사망할 때까지 70-90명의 독일군을 사살했다. 마메토바는 수차례 거부당한 끝에 결국 1942년 만 20세가 되지 않은 나이에 적군에 자원입대하여 처음에는 야전병원의 간호사로 근무하다가 기관총 사수로 전쟁에 참여했고, 1943년 10월 전투 중에 입은 부상으로 사망했다. 몰다굴로바와 마메토바 모두 사후에 소연방 영웅으로 서훈되었는데, 카자흐 여성으로 소연방 영웅의 칭호를 수여받은 이는 이 둘뿐이다.
[5]대통령령에 따르면 ‘정치적 탄압 희생자 기념일’은 “공화국 시민과 사회단체의 호소를 고려하여 정치적 억압의 희생자에 대한 기억을 영구화할 목적으로” 제정되었다. 물론 이때 기억의 대상이 되는 정치적 탄압은 과거에 타민족에게 당한 탄압으로 정권은 현재의 정치적 탄압과 그 희생자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함구한다.
참고문헌
*본 기고문은 전문가 개인의 의견으로,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와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