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구소련체제 붕괴 후 카자흐스탄이 새로운 국가·민족 정체성을 구축해 나가는 과정에서 형성된 이른바 ‘나자르바예프 세대’로 일컬어지는 청년세대의 특징을 고찰한다. 또한 21세기 세계화의 흐름에 대한 현실 인식과 함께 국가적 차원에서 이들에게 독자적인 ‘카자흐성’을 부여하려 하려 했던 종교, 언어 및 영화를 비롯한 문화 정책에 대한 분석을 시도했다. 이를 통해 청년세대의 정체성이 형성된 뿌리와 연원, 그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대해 다각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박영은(한양대학교)
중앙아시아 국가들 중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는 카자흐스탄은 소연방 정책에 따라 1991년 독립 즈음 130여 개 민족이 존재하는 ‘다민족국가’가 되어 있었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공통된 숙명이긴 했지만 이러한 상황은 카자흐스탄이 다양한 민족을 통합적 국민으로 수렴해야 하는 최우선 과제를 던져주었다. 즉 카자흐스탄이 갑작스럽게 맞게 된 독립 이후 소련의 유산에서 벗어나 새로운 현실을 위한 패러다임을 지향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국가의 이러한 정책 프레임은 지난 30년간 카자흐스탄이 정립했던 통치전략으로 구체화되었으며, 그 영향은 자연스럽게 현재의 청년세대에게 의식적·무의식적 반향을 드리웠다.
체제 전환의 시기에는 어느 국가나 심각한 위기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카자흐스탄과 같이 다민족을 하나의 국가라는 이념으로 통합시키고 공통된 의식적 지향점을 노정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위기 극복의식 이상의 전략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카자흐스탄은 시대적 변혁기를 살아내기 위한 국가적 패러다임을 구축하고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것이 소비에트 붕괴 이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30년간 카자흐스탄을 통치해 온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Nursultan Nazarbayev) 시대에 태어나고 성장한 청년 세대들인 것이다. 이른바 ‘나자르바예프 세대(Nazarbayev Generation)’라 일컬을 수 있는 그들은 카자흐스탄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29세 이하의 세대이다.
나자르바예프가 권력을 잡은 이후에 탄생한 그들은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직접적인 기억을 지니고 있지 않다. 다만 역사의 기록이나 부모 세대를 통해서 들은 간접적인 이해가 있을 뿐이다. 또한 그들은 2000년대 초반 이후 카자흐스탄의 정치적 안정기와 상대적인 물질적 풍요의 세계를 맛본 세대이기도 하다. 비록 카자흐스탄이 여전히 종교와 미디어에 있어 공식적인 공공표현에 대한 감시나 제한이 있는 국가라 할지라도 그들은 상대적으로 비교적 자유로운 국가에서 성장해왔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자르바예프 세대’가 형성되어 온 뿌리와 연원, 그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형성시킨 국가적인 전략을 비롯해 그들은 누구이며,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희망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 그들의 사회적·문화적 실천행위가 연유된 배경을 조명하는 것은 카자흐스탄 변혁기의 이념이 국민에게 반영된 거울이자 자화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현 카자흐스탄 청년세대를 형성시켜온 국가적 이념과 이것이 사회·교육적으로 이식된 그들의 특성을 보는 것은 신생독립국가로서 카자흐스탄의 추동력과 그 미래를 가늠하는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독립 이후 카자흐스탄 정부가 가장 열정적으로 추진해온 국가적 과제는 자국의 경제 선진화와 함께 국가 및 민족 정체성 수립을 위해 필수적인 ‘카자흐성(Kazakhness)’의 구현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나자르바예프 정부가 도모한 민족통합의 일차적 근간이 바로 ‘이슬람’이었다. 이에 카자흐스탄은 국가 및 민족 정체성 수립과 전통문화 부활을 위해서 이슬람을 부활시켰다. 꾸란이 카자흐어로 번역되었고, 카자흐 무슬림들은 새롭게 문을 연 모스크에서 자유롭게 기도하고 이맘의 설교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나자르바예프 대통령 자신도 중앙아시아 국가수반으로는 가장 늦었지만 메카의 이슬람 성지 순례를 다녀왔으며, 알 파라비(Abu Nasr al-Farabi)와 같은 중앙아시아에서 추앙받는 이슬람 학자들의 초상화를 화폐 문양으로 넣기도 했다. 젊은이들 역시 해외에서 공부할 수 있는 이슬람 장학금과 함께 메카와 메디나로 인도되는 장학금을 수령하였다.
이러한 부흥의 기운 덕분에 카자흐스탄 독립 1세대인 10대 후반부터 30대의 젊은 카자흐인들은 독립 이후 이슬람을 카자흐스탄 국가정체성을 이루는 핵심 요소 중 하나라고 여기고 있다. 1990년대 후반 카자흐인들의 80% 이상이 스스로를 무슬림이라 여겼고, 그 중 상당수는 20세 미만의 젊은이들이었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하지만 카자흐스탄이 ‘카자흐성’을 구축하기 위한 종교·정신문화 이념으로 ‘이슬람’을 내세우면서도 이슬람에 대해 상당히 양가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이슬람 부활에 대한 카자흐스탄의 공식적인 반응은 심지어 모순적이기도 하다. 2005년 대국민연설에서 나자르바예프는 테러리즘, 정치적 불안 그리고 종교적 극단주의를 21세기의 가장 중대한 위협이자 국가의 경제·사회·정치 현대화에 대한 심각한 장애물로 규정하는 등, 종교적 극단주의와 광신주의에 반대한다는 견해를 반복해서 표명해왔다. 이에 상응하여 국가보안위원회(KNB)와 군당국 역시 종교적 극단주의와 테러리즘을 카자흐스탄의 실제적이고 중대한 위협으로 제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카자흐스탄 교육과학부는 2006년부터 사실상 공립학교에서 히잡 착용을 금지하며 종교적 색채를 배제한 교복 착용을 의무화했다. 즉 카자흐스탄 정부는 국민들, 특히 청소년들이 히잡이나 부르카를 쓰는 등 일상의 공간뿐만 아니라 공적 공간에서 무슬림으로서 종교적 의무를 실천하고자 하는 경우가 늘어나는 현상에 대해서는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카자흐스탄 정부가 학교를 비롯한 공공기관에서 히잡을 금지하려는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는 세속주의에 저항하며 이슬람의 정치화를 추구하는 살라피즘, 와하비즘에 카자흐스탄의 젊은 세대가 포섭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는 것이 지배적 의견이다.
하지만 정부측의 이런 강경책에도 불구하고 이를 위반하는 사례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슬림 인구가 절대 다수인 카자흐스탄의 학교에서 히잡은 이제 또 다른 ‘저항’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히잡 논쟁은 카자흐스탄 국민들 사이에 존재하는 세대 간의 문제를 여실히 드러내는데, 그 단초를 제공한 사람들이 대부분 10대 여학생과 여대생 그리고 10대의 자녀를 둔 젊은 학부모들로서 대부분 독립 이후 태어나거나, 독립 시기에 사회화 과정을 거친 카자흐스탄의 독립 1세대들이다. 즉 히잡 논쟁은 이슬람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기를 원하는 젊은 카자흐인들과 소비에트식 무신론의 잔재에 익숙한 소비에트 세대의 충돌을 보여주며, 카자흐 이슬람의 세대 단절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카자흐스탄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에서 드러나듯이, 젊은 카자흐인들 사이에서 목격되는 이슬람에 대한 관심과 열의는 아이러니하게도 이슬람을 통해 단절된 카자흐 전통을 복원하려 했던 카자흐스탄 정부가 정책적으로 이식한 것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동일한 정부가 이제는 이슬람을 신앙으로 받아들인 그들을 향해 또 다른 감시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카자흐스탄의 이슬람이 진정한 신앙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소비에트식의 무신론 지향이자 소비에트식 국가 통제를 답습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즉 카자흐스탄 정부가 국민에게 ‘카자흐성’을 부여하는 수단으로서 종교를 통제하는, 또 다른 소비에트식 잔재를 그대로 노출시키는 딜레마인 것이다.
1991년 독립 직후 카자흐스탄의 강력한 카자흐화(Kazakhification) 정책은 소비에트 통치 동안 억압되었던 카자흐 언어와 문화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및 교육 등 국가의 전 영역에서 우선시하는 것이었다. 이슬람과 함께 카자흐스탄 정부는 사회주의를 대체하는 통합적인 국민 담론으로 카자흐 언어와 문화를 내세웠다. 토착 민족의 언어로서 카자흐어의 지위 문제가 전면에 부각되었으며, 카자흐어의 학습, 사용 및 문화적 인식의 수준의 강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사실 최근까지 카자흐스탄은 러시아어와 카자흐어 두 언어를 국가 공용어로 채택하는 이중 언어정책을 실행하고 있었다. 이로써 카자흐스탄 사회는 러시아어 사용 집단과 카자흐어 사용 집단이 공존하는 독특한 특성을 갖게 되었다. 카자흐스탄은 대도시일수록, 그리고 카자흐스탄 북부 및 중부 지역으로 갈수록 러시아어 사용이 증가하며, 지방일수록 그리고 카자흐스탄 남부와 서부에 가까워질수록 카자흐어 사용 인구가 증가하고, 러시아어 사용 인구가 적게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카자흐스탄 정부는 카자흐어를 강화하기 위해 러시아어를 대체할 수 있는 대체재 역할로서의 영어를 국가 공용어로 수용하는 삼중언어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카자흐스탄이 현재 추진하고 있는 ‘삼중언어정책’은 최종적으로 카자흐어를 국가 언어로 확고히 하는데 필요한 정부 정책이라고 피력하고 있다. 또한 그는 현재 매년 10만 명 이상 초중등교육기관에서 카자흐어를 배운 고등학교 졸업생들이 배출되고 있으며, 모든 고등학생은 카자흐어, 러시아어, 영어를 구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피력하기도 했다. 그래프에 보는 것과 같이 독립초기에 카자흐스탄 인구 중 카자흐인들이 총 인구의 과반수에도 못 미치는 40%였으나, 2013년에는 국민의 65%에 해당하는 주요 민족으로 자리 잡고 있다. 향후 카자흐스탄이 민족국가로 그리고 카자흐어가 국가 단일 언어로 자리매김하기 위하여 카자흐스탄 정부와 대통령은 점진적으로 카자흐 언어 단일화를 추진해 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카자흐스탄 정부는 장기적인 목표로 카자흐어를 사용하는 민족국가 형성을 위해 카자흐어의 전략적 확산을 도모했다고 할 수 있다. 카자흐어의 확산을 위한 카자흐정부의 밀도있고 단계적인 정책과 더불어 세계 트렌드인 모바일시대에 맞는 새로운 접근방식으로서 SNS를 통한 카자흐어 확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카자흐어 사용 정책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여전히 양분되는 이중성은 드러날 수밖에 없으며, 카자흐스탄 국민들 사이에서는 주사용 언어에 따라 상호 공감이 가능한 주제가 달라지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이러한 양분 현상은 카자흐스탄 청년층의 문화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뿐만 아니라 카자흐스탄 정부는 오늘날 급속한 정치·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대중문화를 이끌어가는 대표적 미디어인 ‘영화’를 정책홍보와 청년세대 동화를 위해 적극 활용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이 1991년 신생 독립국으로 재탄생하게 되자 민족의식 고양과 정체성 모색은 카자흐스탄 영화 정책에서도 주요 화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사회주의와 소비에트 유산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전통문화를 영화 제작으로 적극적으로 표출해야 한다는 당위성 인식으로 이어졌다. 즉 ‘영화’를 민족 정체성 확립의 주요 매체로 인식하여 적극 후원을 했던 것이다.
카자흐스탄이 영화제작을 위해 정치 및 경제 발전과 정신문화 진흥을 표출한 것에는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의 역할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이것은 2009년 11월 23일, 대통령이 문화부 장관과 함께 <카자흐필름>을 방문한 자리에서도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대통령의 발언은 카자흐스탄의 영화산업을 통해 국가 이데올로기와 정책 추진에 영화 제작을 또 하나의 중추적인 동력으로 삼겠다는 의지의 반영이었다. 그 대표적 예가 세르게이 보드로프의 <몽골>과 <유목민>, 아르닥 아미르쿨로프의 <아바이> 등의 영화에서 드러난다. 이는 카자흐스탄이 독립 이후 국민들을 단합시키는 구심점으로 삼은 ‘카자흐 민족 영웅’의 예술적 재현과 관련이 있다. 국민들을 통합할 정신적 좌표를 설정하는데 있어 영웅들이 고난을 극복해 갔던 삶의 이야기는 험난한 시대를 헤쳐 나가야 할 신생 독립국의 입장에서도 유용한 스토리텔링의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13세기에 현재의 카자흐스탄 전역을 석권했던 ‘칭기즈 칸’의 신화 창조부터 수백 년간 분열되었던 카자흐 부족을 통일시키며 18세기 카자흐 민족통합을 이루어 낸 ‘아불라이 한’의 재현, 카자흐어가 문어(文語)로 발전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으며 카자흐스탄 지성의 상징이자 불의와 싸웠던 사회계몽가 ‘아바이 쿠난바예프’와 같은 인물이 영화로 부활하는 당위성이 부여된 것이었다.
카자흐스탄 정부가 칭기즈 칸, 아불라이 한, 아바이 쿠난바예프와 같은 위인들의 형상을 집중 부각하는 것은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의 ‘신(新)유라시아주의’ 구상과 무관하지 않다. 칭기즈 칸을 통해서는 몽골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 카자흐스탄의 자존감 고취, 아불라이 한을 통해 카자흐인들의 민족적 단결의식 강조, 아바이 쿠난바예프를 통해서는 카자흐스탄이 동서양의 문화를 통합하는 코스모폴리탄의 사유체계를 내면화하고 있다는 점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1991년 독립 이후 카자흐스탄 국가 발전상을 전 세계에 알려 자신들이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명실상부한 유라시아 대륙의 주요국가로 부상했다는 대통령의 ‘신유라시아주의’에 정당성을 표출한 것이기도 하다.
카자흐스탄에서 민족정체성과 유목민의 삶을 연결시키는 영화를 많이 제작했던 동향 역시 청년세대에 대한 자연스러운 의식화 작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건조한 사막과 초원이 펼쳐진 카자흐스탄은 예부터 유목민들이 많았기에 ‘유목문화’는 그들의 삶을 규정짓는 정체성의 또 다른 이름이다. 카자흐스탄 감독들이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한 방법으로 수천 년간 이어진 유목생활에 대한 향수를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은 그 때문이다.
특히 카자흐스탄의 뉴웨이브(New Wave) 동향을 일으킨 세릭 아프리모프 감독은 <사냥꾼>에서 유목민들의 정체성과 뿌리 찾기를 보여주며, 세르게이 보드로프 감독의 <유목민> 역시 유목생활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향유하는 영화이다. 루스탐 이브라김베코프의 역사 서사시를 바탕으로 한 영화 <유목민>은 카자흐스탄의 영화기술이 총 집약된 상업 블록버스터로서 ‘카자흐 민족들의 하나됨을 위한 민족주의 프로젝트’차원에서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의 구상에 따라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청년세대에게 의식적으로 접목시키기 위한 문화전략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자르바예프가 정부가 펼쳤던 영상의 정치학은 소비에트 체제에서 중앙아시아의 다큐멘터리 시네마를 국정의 선전 도구로 활용한 양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소연방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도 카자흐스탄은 ‘이데올로기 영화, 경제발전 선전 영화, 역사 영화’를 제작하는 프레임을 지속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소비에트 문화정책에서 자유로워지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 체제에서 사용되었던 국가 선전이나 이데올로기 강화를 위한 접근 방식을 카자흐스탄의 영화에 도입하며 청년세대들이 이를 무의식적으로 수용하도록 한 방증인 것이다.
카자흐스탄 청년세대가 정부 주도의 새로운 ‘카자흐성’ 체현을 위한 다양한 정책의 세례를 받는 것과 함께 이들이 글로벌한 세계화의 물결에 직면했던 것 역시 당연한 시대적 조류였다.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여기서 얻은 정보는 다방면에서 그들에게 영향을 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의 확대는 세계적인 흐름이며, 카자흐스탄은 중앙아시아 국가 중에서 이런 시대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고 있다.
실제로 인터넷은 청년세대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꾸고 있다. 카자흐스탄에서 인터넷 사용자들의 연령대는 주로 16세부터 24세로 36%가 여기에 집중되어 있고 그 다음이 25-34세로 29%, 35세-44세 19%, 45세-54세 11%, 55세-74세는 4%로, 나이가 들수록 인터넷 이용자가 급속하게 줄어들기 때문이다. 카자흐스탄 인터넷 사용자 중 35세 미만이 65%에 달할 만큼 청년세대와 인터넷 사용의 연결고리는 타국에 비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 사용은 청년들의 문화 양극화에도 일조하고 있다. 인터넷 사용자들의 대부분이 아직까지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으며, 전체 사용자 중에 알마티 24%, 아스타나 12%, 카르간다 10%로 카자흐스탄 내 주요 세 도시에 집중되어 있다. 즉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활용해 글로벌 트렌드와 기회에 접근 가능한 부류와 그렇지 않은 부류는 영위하는 삶의 질에 있어 현격한 차이가 나며 대조적인 삶의 패턴을 보인다. 어떤 부류는 새로운 것에 대해 오픈마인드를 갖고 글로벌 이슈에 큰 흥미를 갖고 있으며 자신의 삶에 변화와 개선을 도모하며 창조성과 야망을 갖고 있는데 반해, 또 다른 부류는 무지하며 뉴스나 정치에 그다지 관심이 없으며 사회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데, 이는 어느 정도 인터넷 사용과도 연결될 수 있다.
카자흐스탄 청년들은 주로 영화를 보고, 음악을 다운로드하며 정보를 얻고 뉴스를 읽기 위해 인터넷을 사용하며 교육적인 목적으로 인터넷을 많이 사용하지는 않는다. 일반적으로 젊은이들은 하루에 2-3시간을 온라인이나 텔레비전을 시청하는데 사용한다. 청년 카자흐인들은 그들의 여가시간에 독서를 하지는 않으며, 음악을 듣거나 집안일을 하거나, 친구들과 카페나 극장에 가는 사회적 네트워킹에 사용한다. 대다수가 여가시간에 책은 거의 읽지 않는다.
그들은 보다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길 원하지만 이것이 자신들의 지적 능력을 향상시키거나 학업에서 지식 자체를 얻는 것에는 그다지 주안점을 두지 않는다. 그들은 부유함과 사회적 명성과 물질적 안녕을 성취할 수단으로서 거의 대부분 25세 정도까지는 보다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이것은 다만 높은 소득을 받는 것에 보다 더 큰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Friedrich Ebert Foundation Kazakhstan에서 발간된 보고서에서는 카자흐 청년세대는 혁명적인 세대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다. 살펴본 바와 같이 ‘나자르바예프 세대’는 삶의 목표에 상당히 순응주의적이며, 결혼과 출산을 통한 가족의 가치, 건강한 삶과 물질적 안락에 큰 비중을 둔다.
카자흐스탄의 청년세대가 대체적으로 자신들과 자신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으로 평가한다는 점도 주요한 특징이 될 수 있겠다. 이러한 낙관주의는 카자흐스탄의 경제적 상황에 대한 인식과도 연접된 것이다. 카자흐스탄은 엄청난 부존자원과 광대한 영토를 기반으로 소련 붕괴 이후 출범한 신생공화국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경제성장을 이루어 온 국가이다.
구소련붕괴 후 카자흐스탄 경제는 한동안 상당한 혼란을 겪어야 했고, GDP는 마이너스 성장을 하기도 했지만, 200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되었던 국제 유가 상승이라는 유리한 환경으로 사회적 위기와 정치적 안정을 저해하는 요소들이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현저히 낮은 상태이다. 중앙아시아 타국에 비해 민주주의 성향 역시 두드러지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카자흐스탄의 정치상황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나 젊은이들은 카자흐스탄이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국가의 발전에 개인적으로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믿으며 전반적으로 미래를 낙관적으로 평가한다.
카자흐스탄 청년세대가 자기와 다른 종교·종파·신앙을 가진 사람의 입장과 권리를 이해하는 똘레랑스(tolerantia)와 함께 부모나 사회에 대한 높은 신뢰를 보인다는 점도 특징이다. 이것은 카자흐스탄이 국가 차원에서 민족 간 화합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1995년 헌법과 카자흐스탄 국민의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국민(nation)형성’을 추구하며 초민족적인 카자흐스탄 국민정체성의 형성을 선언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상 카자흐스탄 정부는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다양한 민족 집단을 시민적 형태의 카자흐스탄인으로 성공적으로 통합하여 왔다는 것을 선전하는데 주력하였다. 다민족 국가인 카자흐스탄에서 국민 통합은 중대한 국가적 과제이자 도전이었기에 국가차원의 똘레랑스 정신은 카자흐스탄이 개별 민족의 독자성을 유지하면서도 하나의 평화로운 공동체를 형성해 나가기 위해 끊임없이 청년들에게 주입시켜야 했던 문화적 선결과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카자흐스탄 청년들은 타민족과 사회 전반에 대한 높은 관용과 신뢰를 보여주며, 다양한 문화를 인정하는 문화적 다원주의(pluralism) 정신을 자연스럽게 함양하게 된 것이다.
살펴본 바와 같이, 독립 이후 카자흐스탄 정부는 대대적인 카자흐화 정책을 통해 카자흐 정체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이를 카자흐스탄 국민정체성과 동일시하였기에 종교·언어·문화 등 다방면에서 전략을 강구했다. 그리고 이 정책 패러다임이 이른바 ‘나자르바예프 세대’에게 있어 일정부분 성과를 거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과제는 여전히 균열을 안은 채 진행 중이다. 어쩌면 이러한 딜레마는 과거와 미래를 향하는 두 개의 얼굴을 지닌 야누스(Janus)처럼 역사의 숙명과도 같은 것인지 모른다.
과거 소비에트의 잔재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카자흐성’을 부여하려 하지만 여기에 이미 소비에트의 유산이 무의식적으로 내재되어 있으며, 동시에 지속적으로 미래로 시선을 향하는 세계화 물결의 합류점에 놓여있는 것이 카자흐스탄 청년세대이다.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이러한 난제에도 불구하고 전환과 변혁의 시대를 살아가는 카자흐스탄 청년세대에 대한 탐색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것은 현재의 정치·경제 시스템을 계승하게 될 카자흐스탄의 ‘인적 자원’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질문이자, 향후 카자흐스탄의 성장가능성을 가늠하는 척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박영은(irispen@hanmail.net)은
한국외대 노어과에서 “아나톨리 김의 우주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한양대학교 아태지역연구센터 HK교수로 재직중이다. 러시아와 함께 중앙아시아와 카프카스를 아우르는 유라시아 지역학을 바탕으로 영화·예술·사상 등을 포괄하는 인문학 및 다양한 문화 현상을 연구하고 있다.
참고문헌